권력 야유하는 '삐딱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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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파란색의 하늘 아래 피라미드처럼 우뚝 솟은 세모꼴은 북악산이 분명하다. 녹음이 울창한 북악산 아래 타원형으로 조성된 잔디밭의 녹색도 싱그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맑은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 속 풍경이 낯익다. 청와대 뒤 북악산이 틀림없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청와대 건물이 온 데 간 데 없다. 의뭉스러운 작품의 제목은 무덤덤하게도 '산'이다.

1990년대 초·중반 풍경화로 외도했다 돌아온 민중미술가 이명복이 여덟번째 개인전(4∼12일·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 내놓은 작품들은 대부분 '산'처럼 의뭉스럽다. 이명복의 표현을 빌리자면 '삐딱하게 세상과 주변을 바라본' 결과물들이다. 삐딱한 시선을 통해 이명복이 공격하는 대상은 '권력과 인간의 탐욕'이다.

1백50호 캔버스 두 장을 이어붙인 이번 전시의 최대작 '도살'은 말 그대로 살풍경이다. 그림 중앙과 좌·우, 육중하게 통째로 매달려 있는 소고기(혹은 돼지고기) 덩어리들 사이사이로 인간들이 단말마의 비명이라도 지를 듯 몸이 뒤틀린 채 쓰러지고 있다. 오른쪽에는 두 냉혈한이 전리품처럼 접시 위에 놓인 고깃덩이를 썰고 있고 왼쪽 아래 사람은 도살된 소의 배를 한창 가르는 중이다. 매달린 고깃덩어리들 속에 언뜻언뜻 사람도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애들이 커졌어요'나 '세 남자'의 비판적 시선은 보다 직접적으로 권력을 겨냥, 조롱하고 있다. '애들이…' 속의 DJ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천진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아이들과 비슷한 체구다. 국정 5년을 통해 왜소해진 것이다. '세 남자'는 DJ·이명복 자신·신승남 전 검찰총장이 나란히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계급장 떼고' 한자리에 선 최고 권력자들은 이명복과 똑같은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수상한 정물'이나 '홍수'에서는 인간의 탐욕이 공격 대상이 됐다. 밭에서 금방 뽑은 듯한 싱싱한 배추와 통닭구이가 SF적으로 이종교배된 괴이쩍은 음식물(수상한 정물)이 언제 우리 식탁에 오를지 모를 일이다. 고깃덩이 사이로 우거지·콩나물·선지 등이 기름지게 떠있는 홍수 같은 해장국은 실감나게 확대·재현해 놓고 보니 결코 먹음직스럽지 않다.

'위대한 오만'에서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왜소한 인물로 묘사해 놓았다.

1982년 민중미술 그룹 '임술년'에 창립멤버로 참여, 현실의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했던 이명복은 한때 "그림은 진실에 닿아 갈수록 검은 색이 된다"고 선언했던 싸움꾼이었다. 자신보다 두배는 커보이는 체구의 미군과 함께 어디론가 걸어가는 이태원 양공주의 뒷모습을 그린 '그날 이후'는 민중미술의 성과를 소개할 때 단골로 등장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이념적 대립전선이 무너지면서 싸울 대상이 없어진 민중 미술가들이 판을 걷을 때 이명복도 한눈을 팔았다. 갑오 농민군 최후의 격전지인 공주 곰나루 등 역사적인 현장의 상처들을 다뤘다고는 하지만 역사적인 내력을 지우면 작가의 소문난 그림 실력으로 뽑아낸 그럴듯한 풍경화들을 그렸을 뿐이다.

이명복은 98년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동시대인들과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없는 개인적인 작업인 풍경화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98년 개인전에 이어 이번 전시도 완연한 민중미술 그림이다.

다만 그림의 대상들을 대하는 태도는 부분 수정됐다. "일반 소시민들이 느낄 수 있는 짜증나는 정치, 오만한 미국에 대한 혐오, 먹거리 걱정 등을 대상으로 삼았고 그림의 색상·분위기도 예전보다 다채로워지고 밝아졌다"는 게 이명복의 변이다.

모두가 떠난 파장에 외딴 섬처럼 현실 고발을 고집하는 작업의 장점과 단점이 궁금해졌다. 장점이라면 역시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 능력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느끼면 된다. 대신 빚지게 된 것은 자칫 빈곤하게 느껴지는 그림의 내적인 풍부함일 것이다. 이명복 스스로도 평면 작업의 한계를 인정한다. 때문에 "설치 같은 옆동네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민중미술을 고집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이명복은 "솔직히 뚜렷한 대답이 없다. 하지만 캔버스의 빈 여백을 채우는 산고와도 같은 과정을 거치며 희열을 느낀다"고 답한다. 분명한 것은 일반인들이 따라갈 수 있는 이해 수준과 동떨어져 마치 트렌드처럼 정신없이 미술이 변해갈 때 이명복의 민중미술은 솔직함과 우직함만으로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명복 개인전은 예술의 전당이 올해 시작한 기획전 '젊은 작가전'의 두번째 순서다. 대통령선거가 있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정치 미학'을 주제로 정하면서 이명복전이 성사됐다. 02-580-1515.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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