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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허 찌르는 실험정신에 몰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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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눈 내리는 성탄절 전날, 한 남자가 침실에서 등에 칼이 꽂힌 시체로 발견된다. 자살은 물론 아닌데,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다. 아내와 두 딸, 여동생·장모·처제·하녀·애인 등 간밤에 그 집에 있었던 여덟명의 여인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범인은 누구일까.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오랫동안 감춰온 놀라운 비밀이 하나 둘 베일을 벗는다.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부문에서 소개된 프랑스 영화 '여덟명의 여인들'. 지난 2월 베를린 영화제 경쟁작으로 선을 보였을 때, 유럽 영화인들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카트린 드뇌브·이자벨 위페르·에마뉘엘 베아르 등 정상급 여배우들의 노련한 연기, 추리극과 뮤지컬을 섞은 독창적인 스타일, 허를 찌르는 결말 등이 평단의 아낌없는 갈채를 받았다. 여덟명의 여인에게 은곰상(단체연기상)이 선사된 것은 물론이었다.

오랫동안 자국 영화시장의 침체를 겪어온 프랑스인들에게 이 영화는 '구세주'였다.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면서 제작비 6백만달러(약 72억원)의 세 배가 넘는 수입을 거뒀던 것. 지난 16일 부산을 방문한 프랑수아 오종(35)감독을 만났다.

그의 작품에는 '엽기''도발''예측불가능'등의 수식어가 붙어 왔다. 살인 장면으로 시작된 '여덟명의 여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불륜·임신·동성애·협박 등이 끼어들며 난장판이 된다. 상황은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다 가족들의 치부를 훤히 드러낸 채 엉뚱한 결말을 맺는다.

"다른 감독들도 그렇겠지만 난 남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살인이 벌어지고 전화선이 끊기고 자동차 엔진이 고장나는 등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는 스릴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노래를 하는 여배우들로 인해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뭔가 엉뚱한 것을 제시하는 실험정신이 내겐 가장 중요하다."

데뷔한 지 6년이 된 소장 감독이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을 한 자리에 끌어모을 수 있었던 저력이 궁금했다. "특별한 '빽'은 없다. 전작들이 비교적 호평을 받았던 덕이 컸을 것이다. 또 배우들끼리도 여덟명이 한꺼번에 나온다는 데 대한 호기심이 작용했던 것 같다."

'여덟명의 여인들'의 등장인물은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미녀 배우들을 모델로 했다. 가령 드뇌브가 연기한 엄마 게비는 라나 터너를, 파니 아르당이 연기한 게비의 시누이 피에레트는 에바 가드너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에른스트 루비치나 빌리 와일더가 만든 그 시절의 영화를 보면 여배우를 매혹적이고 기품 있는 여신으로 그려낸다. 보기만 해도 황홀한 그녀들을 내 영화로 경배하고 싶었다."

지난달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린 '프랑수아 오종 영화제'를 찾은 관객의 80%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리고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는 것도. 하루 종일 이어진 인터뷰에 지쳐보이던 그의 마른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여성을 정직하게 그리려 애쓴다. 내 영화 속 여성들은 강인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저 남자가 없어졌으면…'하고 생각하는 즉시 이를 실행에 옮기는 식이다. 여성 관객들은 아마 그녀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선망하면서 쾌감을 느낄 것이다."

그는 불과 몇년 새 무섭게 성장한 소감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난 저예산 영화를 좋아한다. 성공했다고 할리우드로 떠날 마음은 전혀 없다. 제작자들은 날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감독'이라며 환영한다. 남는 장사인데 누가 날 마다하겠나(웃음)."

오종은 파리 1대학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국립영화학교(FEMIS)에서 수학했다. 98년 '시트콤'이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받기 시작하면서 '크리미널 러버'(99년)'워터 드롭스 온 버닝 록''사랑의 추억'(2000년) 등이 베를린 등 세계 영화제에서 각광받았다. '여덟명의 여인들'은 부산영화제에서 20일에 다시 한번 상영된다. 전국 개봉은 12월 24일이다.

부산=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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