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스님 / 칼럼』공존의 미학-2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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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因)과 연(緣), 아는 만큼 보이는 세상

나는 아가용품을 가지고 미혼모 시설을 방문을 하곤 한다. 내가 자주 찾는 시설 가운데 어느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미혼모일시보호소에서의 일이다. 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아프게 한 건 다름 아닌 그 많은 미혼모들 가운데 아직 엄마가 되기에는 이른 나이, 부모의 손길이 절실한 나이의 청소년들을 보게 된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 아이가 무엇을 알기에 아이를 낳은 것일까?

부모로써의 책임감에서인지 아이를 낳겠다는 마음으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시설에 거주하는 모습을 보며, 아직 젓도 떼지 못한 아가들. 누런 황달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갓난아가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연신 눈물을 훔치며 한손에는 아이를 안고 또 한손은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울어야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슬픔을 주는 그 상황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아이를 낳아 짧은 기간에 나와야 하는 보호소의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는 아이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게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말 그대로 생이별의 고통이 존재하는 좁은 공간이다. 아가도 엄마도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아플까. 한창 엄마 품이 그리울 아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엄마의 마음, 그러나 일시보호소의 규정대로 아가와 엄마는 더 이상 정들기 전에 헤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 아가들은 입양을 보내거나 보육원으로 가게 된다. 나는 이런 순간을 접할 때 마나 느끼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미혼모와 아가 모두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의문점은 아가와 엄마가 생이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시보호소가 아닌 아가와 엄마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엄마가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마련될 때 까지 보호해줄 수 있는 장기쉼터를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나.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에게 특혜를 주고,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못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 할 때가 많다.

------------『지율스님의 미혼모 일시보호소를 다녀온 후 』중에서 --------------

최근 들어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을 시청하다보면, 사회적으로 낙태 근절 운동이 확산되면서 낙태, 어린아이 성폭행 등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 가장 문제시 되고 있는 “청소년 임신과 낙태,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를 두고 우리 사회의 낙태근절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과 대안마련 움직임이 그 어느 때 보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특히 우리의 처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청소년 낙태문제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짚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청 내내 필자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논쟁만이 지속될 뿐 본질적인 대안마련이 시급한 상태라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청소년들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청소년들의 성에 대한 욕구야 어쩔 수 없다하지만 올바른 성에 대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없는 걸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이러한 현실에서 “설마 우리아이는 아니겠지”라고 괄목하는 마음 가져보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 한통화의 전화 상담을 통해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나 전화를 끊었던 기억이 난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밝힌 그는 “제가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그 여자 친구하고 헤어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임신을 했습니다. 낙태를 한 후, 그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 친구와 만나려고 합니다.”는 말에 필자는 “그 여자 친구가 몇 살이냐고 묻자 ” 학생은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낙태시킬 돈은 있냐?”는 질문에 그 학생은 “네! 아르바이트해서 마련한 돈은 있습니다.”

필자는 “낙태라는 것은 학생은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기는 일이다. 왜냐하면 낙태로 인하여 살아가는데 죄책감은 물론 그로인해 힘들어 질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잊혀 지지 않으니 하지 말아야 할 일중에 하나다.” 라고 일러주었다. 그 다음 필자를 더욱 더 당황스럽게 했던 학생의 대답은 “그게 어때서요?” 그러더니 16살짜리 여자 친구와 사귀다 임신이 된 적이 있었는데, 낙태를 시켰었다는 말에 너무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여 여인은 물론 소중한 생명을 낙태시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해야 옳지 않은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그 남학생에게 욕설이라도 하고 싶었다. 물론 성이라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우리가 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행복을 주는 것일까? 그와 반대로 불행을 안겨주는 것일까?

우선 정상적인 성에 있어서의 행복은 나에게 주어진 생명을 잘 키워 가정에 행복을 주는 것이다. 반대로 불행은 전자에서의 이야기처럼 원하지 않은 사랑,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아이를 가져 나의 불행보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에게 불행을 주는 것이 아닌가.

비단 성에 대한 인식뿐만이 아니다. 인성보다는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회 지도층 어른들의 부정부패를 접하고 이중적인 사회에 모순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문제점들은 어디에서 오늘 걸까?우선,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의 조기성장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청소년들의 입장에선 분출되는 성적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고 또 청소년들 스스로가 이러한 문제를 금기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성을 금기하고 억압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청소년들 스스로는 성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에 관해 무조건 ‘미성년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주변의 어른들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막상 심각한 ‘상황’이 이르러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청소년들의 성에 대한 인식이 왜 이런 문제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결국 가장 큰 원인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 즉 인터넷의 발달로 예전보다 성인프로나 야한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고, 대중매체 등을 통해 어른들의 성에 대한 간접 경험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양면성 이중적 논리를 펼치고 있는 어른들이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우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레 그들의 성의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아직은 어려서 안 된다고 하면서 실제로 여관에서 돈만 내면 아이들을 받아주는 것도 어른이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적극적으로 돈을 주고 사는 어른들의 이중적 모순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TV가 없어 동네 부자 집에가 눈치 보면서 보았고, 영화를 보고 싶으면 만홧가게에서 돈을 주고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는 어떤가. 인터넷으로 자기가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음껏 볼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 너무 쉽게 노출되어있다는 점이다. 대중매체에서의 노골적인 키스신은 물론이고 자유롭게 보여 지는 화보나 그림을 보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하는 여의치 않은 생각을 해본다.
가끔 나이 드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16살 시집와 살아가는 이야기 들 서로가 철모르고 지내는 과거의 일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 당시, 거의 십대에 시집․장가가던 시절. 지금 따지면 청소년이다. 십대를 넘으면 시집못가 걱정하던 시절. 아마도 그 시기가 결혼하여 아이를 쉽게 갖기 때문 아닐까한다. 지금의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조기 성장속도가 빨라지면서 자연스레 이른 나이에 이성에 눈을 뜨기 때문에 성에 대한 호기심과 자극 주는 것이 아닐까? 그 당시는 초경의 시작과 함께 이른 나이에 혼례를 치르는 과정속에 충동적인마음이 없었지만 작금의 시대는 어떤가.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도 모든 문화와 생활이 바뀌었다. 청소년의 시기에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수험생의 입장에서 공부해야하고 성에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나 억제를 하지 못하는 등 결과적으로 성 범행을 할 수 밖에 현실에 놓여있다. 우리는 성 범행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인연 없는 만남이나 사랑의 인연으로 인하여 임신되어 아이를 낙태한다면 영원히 씻기 어려운 죄를 가지게 된다. 첫째 주어진 생명, 아이를 죽인 죄요. 둘째 살아가면서 항상 마음속에 고통을 받는 것이요. 셋째 청소년시절에 성범죄를 지어 자식 보기 미안한 마음이요.
한편 필자가 프로라이프에 자문위원으로 참석하면서, 부부의 합의도 아니고 돈만주면 언제든지 낙태한다는 의식을 끊어야한다는 생각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남녀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여자가 그 막중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은 낙태로 처벌받는다는 인식이 없었다. 국가가 형벌권을 가지고 이 문제를 사회법적 테두리 안에 넣고 여자보다 남자에게 처벌을 가중시키는 죄를 쥐어주어야 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아동 성폭행이나 강간의 경우, 사회 비판 속에 냉혹한 형벌을 일률적으로 준다면 청소년 범행이 줄어들지 않을까? 산부인과 의료진은 청소년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낙태를 선택해야 한다면 남자친구는 물론 부모님의 동의하에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치러지게 된다면 올바른 판단이 성립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근본적이 문제는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경우 전자에서도 밝혔듯이 일시보호소가 아닌 장기적으로 머물 수 있는 쉼터나 청소년이기에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마련될 때 까지 보호해줄 수 있는 공간과 함께 특혜를 주는 등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보건복지부에 바래고 싶은 것은 과거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의 구호였듯이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요, 자식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자”는 취지를 되살려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구담사 지율스님

<본 자료는 정보제공을 위한 보도 자료입니다.>

조인스닷컴(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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