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는 구속용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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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지난 40여년 동안 불모의 땅에서 기적을 일궈냈다. 자본과 기술의 제약에도 왕성한 도전 의식과 무한한 사명감으로 국부를 키워 세계 13대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다. 정부와 근로자들의 기여도 물론 컸지만 기업인의 추진력과 결단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셉 슘페터는 일찍이 경제 성장의 동인은 '혁신(renovation)'이고, 혁신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서 비롯된다며, 기업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기업의 천국인 미국은 기업가 정신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식하고 기업인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의 한 각료는 "GM에 유익한 것은 미국에 유익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미국인들이 누렸던 '황금의 60년대(golden sixties)'가 이같은 기업 친화적인 사회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또한 "GE의 잭 웰치 회장이나 MS의 빌 게이츠 회장 같은 기업인들이 미국의 자존심을 되찾아 주었고, 앞으로도 미국을 떠받칠 주역"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아직도 기업과 기업인을 백안시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고용을 창출하고 조세를 부담함으로써 나라를 먹여살리는 애국자로 존경받기는커녕 툭하면 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국가 부도사태를 몰고 온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렇게 된 데는 기업인의 잘못도 있겠지만 제도나 법령 탓도 크다. 지키기 힘든 수많은 처벌조항과 규제로 인해 조금만 실수를 저질러도 파렴치범이나 범죄자로 전락하기 일쑤다. 지난 1년 간의 경제사범이 12만명을 넘고 구속자도 1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이 중에는 처벌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기업인은 한번 실패하면 사람도 아니다. 부와 명예로 주위의 부러움을 받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별'을 달고 인생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법치국가에서 기업인이라고 법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다. 합법적으로 회사를 운영해야 하고 이를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지켜야 할 법령이나 규칙이 셀 수 없이 많아 이를 제대로 준수해 나가면서 경영을 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건축·환경·금융·세제·노동·안전 등 기업 관련법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규제 일변도로 돼 있어 범법자와 전과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법이 이러니 노조·시민단체가 걸핏하면 고소·고발하게 된다. 따라서 웬만한 회사의 대표이사가 되려면 경찰서와 법원은 물론이고 감옥까지 몇번 갔다 올 각오를 해야 한다. 심지어 어느 대표이사는 자기가 고발당해 수배자가 된 것도 모르고 출국하려다 망신당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구속용 대표이사'라는 자탄의 소리가 나올 정도일까. 최근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되고부터는 위험 부담이 더 커지고 있다. 이전처럼 내부이사의 숫자가 많을 때는 대기업의 경우 공장마다 대표이사를 선임했지만 사외이사 제도 때문에 이사 숫자를 줄이다 보니 이마저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기업인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데는 시민단체나 소비자단체도 한몫하고 있다. 부실기업보다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기업'을 주요 감시 대상으로 삼고 그들 기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심어주고 한국의 대외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역기능을 할 우려가 크다.

기업이 법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현실에선 기업인을 범법자로 만들고, 기업인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하는 풍토에선 기업 의욕이 생겨나기 어렵고 존경과 찬사를 받는 경영자가 나올 수도 없다.

기업인에게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기에 앞서 이제라도 처벌만능식의 경제사범 다루기를 제도적·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웬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인 신체적 형벌이나 벌금형보다 금전적 제재인 과징금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나아가 시장기능에 의한 처벌이나 감시체계 확립을 통해 기업인의 전과자 양산을 막아야 한다. 우리나라에나 있을 법한 '구속용 대표이사'라는 자조 섞인 용어를 이 땅에서 기업하는 사람의 숙명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기업 하기 편한 환경을 조성하지 못하는 정부의 태도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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