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6회 껍데기지방자치제 내실다져야]중앙정부 실권 여전, 잡무만 떠넘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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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자치단체장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도지사는 얼굴 마담이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중앙 정부가 권한의 상당 부분을 지방에 넘기지 않고, 산하 기관 역시 지방에서 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 장관에서 자치단체장으로 변신한 박태영 전남지사의 하소연이다.

지자체와 비슷한 업무를 처리하는 7천여 특별지방행정기관들이 아직도 지방에서 역할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방정부가 처리하는 것이 적절한 2천5백여 사무를 실질적으로 중앙 부처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은 허울뿐이라는 지적이다.

◇겹치기 행정, 중복업무 부지기수=올 초 전북 익산의 다국적 농약제조업체인 노바티스 코리아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외국인 사장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근로자들이 반발한 것이다. 생산라인이 멈추자 사장은 전북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청 담당공무원은 "우리에게는 실권이 없으니 전북지방노동청과 얘기하라"고 알려줬다. 노동청을 찾은 사장은 "한국 현실은 선진국과 다른 것을 잘 알지 않느냐. 자치단체를 통해 정치력으로 해결하라"는 답변만 들었다.

전북도청 민봉한 자치행정국장은 "노동 분야에 대한 조직과 인력은 지방노동청이나 지자체가 엇비슷하지만 법적 권한은 전적으로 지방노동청이 쥐고 있다. 중복 행정과 비효율 업무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 행정도 마찬가지다. 전북도의 경우 경제통상국과 전주지방중기청이 매년 수천억원씩 들여 벤처기업 지원사업을 중복적으로 벌인다. 실제 전북에서 공장을 운영하거나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들은 전북지방중소기업청과 전북도청 양쪽의 눈치를 봐야 한다. 전자부품업체의 金모(52) 사장은 "지방중기청과 도청이 각각 매년 1천억원 규모의 중소기업 자금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지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업무를 한 군데로 통합하고, 관련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기준에 따라 기업을 선정, 실질적으로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토관리청·병무청·항만청 등의 지방업무 중복 실태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산경제가꾸기시민연대 박인호 공동의장은 "홍콩·싱가포르·고베 등 세계 30대 항구도시는 항만운영을 지자체가 맡고 있지만, 부산과 인천은 투자관리기본법에 따라 중앙 정부가 관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알맹이 없는 사무이양 부담만 늘어=지난해 본지의 '지방을 살리자'시리즈에서도 지적했지만 중앙 권한의 지방이양이 지지부진하다. 1999년 이후 지난해까지 지방으로 넘겨진 사무는 20건이었고, 올해 1백38건으로 늘어난 것이 전부다.

지방이양추진위원회는 올 상반기까지 모두 2천5백5건의 사무를 지방이양 대상업무로 지정했지만, 일반 부처들의 반발로 진전이 없는 상태다. 이에 추진위는 2003년 중 중앙행정기관 권한을 지방으로 일괄 이양하는 관련법 제정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자치단체장들의 고민도 간단치 않다. 지방으로 이양하는 사무의 양도 문제지만 질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측은 "지방이양 사무가 부처 이기주의로 귀찮고 어려운 일 위주로 추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민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교통·도시계획·국토이용계획 관련 업무 등에 대한 지방정부의 권한이 실질적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전대 안성호(행정정치학)교수는 "지방으로 넘어온 사무조차 '옥외광고물의 관리'등 비권력적·기능적 업무에 그치고 관련 인력까지 줄이도록 되어 있어 지자체로선 알맹이 없이 일만 늘게 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환경부의 공단업체 오염관리 및 단속권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이달부터 이 업무가 지자체에 이양됐지만 업무량에 비해 턱없이 적은 인원이 배정돼 지자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대구시의 경우 환경담당 공무원 45명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14명만 할당했다.

◇과감히 넘기고 책임 물어야=지방문제 전문가들은 국가와 지방간 합리적 역할분담을 위해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림대 성경륭 교수는 "자치입법권과 재정권, 인사조직권 등을 포함하는 지방분권특별법을 조족히 제정해 특별지방행정기관을 과감히 지방정부에 예속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사무를 이양하면서 예산과 인력까지 함께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북 군산의 군장산업단지를 보자. 여의도 면적의 12배에 달하는 이곳은 군산시청 지역경제과 공무원 2명이 담당한다. 군산시는 산업단지관리공단과 토지공사 등에서 관련 업무를 넘겨받을 예정이지만 조직 확대와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업무를 맡고 있는 시청 지역경제과의 신재현씨는 "여천·포항 등 국가공업단지가 있는 지자체의 현실을 감안해 행정자치부에 인력 충원을 요청했지만 현재 부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자치단체장들은 중앙 사무 가운데 특히 지방공무원의 증원 등 조직과 재원 조달 등 재정에 관한 권한들이 지방으로 넘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황대현 대표회장(대구 달서구청장)은 "행자부가 지자체의 공무원을 총정원제로 묶어두는 바람에 사람이 필요해도 뽑을 수 없다. 지자체가 사업을 위해 지방채를 발행하려 해도 행자부 승인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워 포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자치단체장의 권한이 확대되면 부실과 탈선의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있지만, 주민투표제·주민소환제 도입 등 제도보완을 통해 권한과 책임을 연동시키면 된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한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민선 1기에서 23명, 2기에서 41명 등 자치단체장 64명이 뇌물수수 등 혐의로 사법처리됐다. 지난 7월 취임한 민선 3기 자치단체장 2백32명 중에서 벌써 11명이 기소됐다.

계명대 박세정 교수는 "선거를 의식한 단체장의 선심성 행정과 정실인사, 이권 챙기기와 일부 자질이 부족한 공무원들의 문제는 지자체가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라며 지방정부의 체질개선론을 제기한다.

광주대 이민원 교수는 "광주시가 지역 특화산업으로 광(光)자가 들어가니까 적합하다고 광산업을 책정하거나 무리하게 지하철을 건설하는 등 부실한 의사결정을 하거나, 공직사회의 취약한 인재층도 문제"라며 지방정부의 자질론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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