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막막 현실은 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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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박이소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는 여느 전시장과 달리 심심하다. 심드렁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작가는 뭔가 보여주려기보다 덜어내고 지우려 작심한 듯, 우리 현실을 헐렁하고 후줄근하게 비워놓았다. 1층 전면에서 관람객을 맞는 '내추럴 드로잉'은 1996∼99라는 제작 연도가 무색하게 큼직한 종이에 산을 그리다 만 듯한 연필 긋기가 싱겁다. 푸른 하늘에 흰 풍선 8개가 둥둥 떠가는 듯한 아크릴화는 엉뚱하게 '팔방미인'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작가는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늘로 바뀌던 그 천장에서 막막하고 무력한 우주 속 인간을 절감했다니 그 얘기인가 싶기도 하다. 풀기 없으나 말간 그 하늘은 무심한 해방과도 통한다. "이 세상의 모든 어설픈 것과 쓰잘 데 없는 것, 약한 것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싶다"는 작가 마음처럼도 비친다.

지하층은 좀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때로 무릎에 힘 빠지게 하는 우리 나날이 추레하게 펼쳐지고 있다. 각목으로 대충 얽어맨 구조물에 매달린 열 개의 허름한 조명이 고개를 들어 하얀 벽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당신의 밝은 미래'다. "알 수 없음과 오해가 지배하는 일상에 부대끼는 우리의 막막함과,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 이루는 거대한 것의 초라함"에 대한 작가 관심이지 싶다. 콘크리트·포장상자·합지 등 개발도상국에서 자주 쓰이던 건축자재에 대한 그의 애호는 여전하다. 그는 조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나, 그 각박함을 여유로 풀어내는 긍정의 정서를 보여준다.

프랑스 기업 에르메스 코리아가 해마다 주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의 2002년 수상자인 박이소(45)씨가 꾸린 수상기념전은 이렇듯 헛헛해서 보는 이의 굳은 어깨를 풀어준다. 11월 3일까지. 02-734-8215.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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