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청맞은 쉰세대 '유쾌한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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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순풍 산부인과', 2000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2002년 가을 '똑바로 살아라'. '순풍…'을 통해 한국적 '토종' 시트콤을 개척한 김병욱 PD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순풍…' 때 스타덤에 오른 박영규와 '웬만해선…'에서 이미지를 확 바꾼 노주현이라는 투 톱 카드를 들고서다.

'똑바로 살아라'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일상적인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인기는 별로 없지만 돈많은 탤런트 노주현, 그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동서 박영규, 귀하게 자랐지만 남편 때문에 궁상맞게 사는 박영규의 아내 이응경, 금융회사 지점장인 노처녀 김연주 등이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김병욱 PD는 "그동안은 한편에 두 가지 에피소드를 넣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무척 소모적인 작업이었다. 이번에는 일일극처럼 이야기의 연속성을 강화해 좀 더 입체적인 이야기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이 시트콤 속에는 또 하나의 드라마가 나온다. 일명 '액자극'이다. 노주현은 극중 사극 '난중일기'에서 원균 역을 맡아 간악한 장군을 연기한다. 시청자들은 홈페이지에 "노주현 죽여라"라는 음해성 글을 띄우는 데도 본인은 마냥 인기가 있다고 좋아하는 등 아기자기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한국에 시트콤이 도입된 지 이제 10년. 'LA 아리랑'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순풍…'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요즘도 방송사마다 시트콤이라는 이름 아래 각개전투하고 있지만 성적은 영 신통치 않다. '똑바로 살아라'가 시트콤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패러디 광고를 찍다

10월 초 어느 따스한 날 경기도 용인민속촌. 누명을 뒤집어쓴 한 선비가 소달구지에 실려 귀양가고 있다. 평소 선비를 따르던 마을 사람들은 달구지를 따라가며 울부짖는다. 이때 한 사람이 먼길 가는 선비에게 햄버거를 내민다. 체면 때문에 앞만 보던 선비, 참지 못한 듯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햄버거를 잡는다. 하지만 너무 큰햄버거는 나무 형틀 사이에 끼여 '그림에 떡'이 되고, 화가 난 선비가 벌떡 일어선다. "이봐 당신! 너무 크다는 생각 안드나?"

중후한 선비의 마지막 외침이 허를 찌른다. 최근 TV 전파를 타고 있는 한 햄버거 회사의 CF가 화제다. 탤런트 노주현(55)씨는 이 CF로 '니들이 게 맛을 알아'의 신구씨처럼 제2의 전성기를 예고하고 있다.

"아, 너무 쑥스러워 혼났어요. NG를 얼마나 냈는지…. 지금껏 양복이나 커피처럼 폼잡는 광고만 찍다보니 많이 어색했죠. 하지만 재밌기도 했어요. 지금이 아니면 평생토록 사극 연기 해볼 기회도 없을 테니까."

그는 남들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즐겼다. 광고 출연 제의를 선뜻 받아들인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쉽게 다가서고 싶어서"였다. 그는 중견 탤런트에 머물려 하지 않았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은 욕심은 더 커졌다.

시트콤에 돌아오다

25일 SBS 일산 탄현제작센터 B스튜디오. 11월 4일 첫 방영되는 SBS 새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의 첫 촬영이 있는 날이다. 완성된 세트에 커튼을 달고, 조명 위치를 조정하고, 주변 청소를 하느라 모두들 분주하다. 주무대가 되는 거실에서는 노주현·박영규씨가 리허설 중이다. 두사람이 1천원을 걸고 손바닥 치기 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어허, 이것봐라. 아싸. 넘어가, 넘어가, 넘어가!"

박영규씨가 뒤로 넘어지지 않으려 뒤뚱거리는 순간, 노주현씨가 오른손으로 연신 장풍을 보내며 넘어뜨리려 애쓴다. 순간 이를 구경하던 다른 연기자들과 스태프 사이에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왔다.

"뭔가 대박이 날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처음 대본을 받아서 읽는데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할 때도 그랬었죠."

노주현은 시트콤 '웬만해선…'에서 그간 보여준 이미지와 1백80도 다른 모습으로 시청자를 '경악'케 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먹는 것에 목숨 걸고, 직장에선 한없이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시트콤 속에서도 연기자로 나온다. 하고 싶은 말 막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버럭 지르는, 무척 강렬한 성격의 인물이다. 하지만 어딘지 모자라고 순진한 면도 있다. 극중 '난중일기'에서 연기자들이 다 꺼리는 원균 역으로 출연한 것도 이유가 있다. "여인천하의 정난정 처럼 멋지게 그려준다"는 제작진의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시트콤을 하기 전 그의 이미지는 중후함 또는 깔끔함이었다. 젊은 시절엔 '유학생'이나 재벌 2세 역을 도맡았고, 중년이 돼서도 대기업 사장처럼 최상류층 역할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화려한 가운데서도 그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어떤 역할이든 잘 할 자신이 있는데 항상 들어오는 역은 그런 것이었어요. 그냥 이렇게 연기하다 죽는구나 싶던 차에 시트콤을 하자는 제안이 왔어요. 이거구나 싶었죠."

그는 "우리나라에도 캐스팅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배우에 대해 연구하고 거기서 다른 모습을 찾아내 TV로 보여줄 때 그 배우 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록 늦게나마 시트콤에 합류한 걸 그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박지영 기자 naz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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