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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7>제104화두더지인생…발굴40년 2 학창시절 실습발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덮어놓고 지망한 고고인류학과에 합격해 대학 생활을 하다보니 인류학보다는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고고학은 발굴조사를 해야만 유구(遺構)와 유물(遺物)을 찾을 수 있고 그것들을 통해 잃어버렸던 역사의 고리를 연결해 주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장에 나갈 일이 많기 때문에 강의실의 답답함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바로 현장조사를 통한 실습교육이다. 대학에 입학해 최초의 실습발굴은 3학년 때인 1964년 가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백제시대 풍납토성이었다. 실습의 목적은 실지 발굴조사를 통해 고고학의 발굴조사 방법을 배우게 하는 그야말로 테스트 발굴이었다.

쉽게 말해 땅속에 묻혀 있는 유구를 찾아내고, 출토되는 유물을 어떻게 기록·촬영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등에서 시작해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법까지 배우는 그야말로 고고학 강의의 종합판이었다. 그래서 학부 3학년에 올라가서야 실습과목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내 인생에서 학문적인 목적으로 삽과 꽃삽을 들고 땅을 파 보기는 처음이었다. 동료들과 어울려 10월의 가을 햇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리며 삽질을 해야 했지만 당시는 젊음이 넘쳐 지치는 줄 몰랐다.

한두 시간 정도 하는 실습이 아니고 다른 수업이 없으면 종일 지속됐다. 덕분에 하루종일 땅을 파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종일 땅과 씨름하고 밤늦게 하숙집으로 돌아오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발굴은 신났다. 그것은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과거의 유물이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에 신기함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은 풍납동이 복작거리는 번화가로 바뀌었지만 40여년 전에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 시외버스였고, 한강 다리로는 두번째로 건설된 광진교를 건너야 했다. 당시 한강의 다리는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 둘뿐이었다.

풍납동 토성과 주변은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한강이 범람하면 가끔씩 잠기곤 해 시가지가 형성될 형편이 못됐다. 때문에 어찌 보면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어 대학교에서 학생들 수업의 일환으로 땅을 조금 파 시굴조사를 하겠다고 해도 땅 주인은 크게 시비걸지 않았고 오히려 관대했다.

나는 삼불 김원룡 선생이 지시하는 대로 땅을 파면서 술 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다. 대학 3학년 2학기면 서서히 사회 진출도 생각하는 시기였고, 성인 대접도 받는 나이였기 때문에 작업하면서 인부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일 수도 있었다.

당시 천호동 막걸리는 맛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맛좋은 천호동 막걸리는 말하자면 불법으로 제조된 밀주였다. 당시에는 쌀 소비를 막기 위해 탁주인 막걸리 제조를 정부에서 불허했는데, 만약 불법으로 밀주를 제조하다 발각되는 날이면 제조자는 큰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불법 제조였기 때문에 무슨 용기를 제대로 갖추어서 파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비닐봉지에 몇 되씩 퍼담아 날라야 했다. 말하자면 물부대가 아닌 술부대를 매고 적지 않은 거리를 나르려니 꽤나 힘들었다.

한번은 어깨에 매고 걷다 잘못해 막걸리 주머니가 터져 막걸리 벼락을 맞기도 했다. 물에 빠진 생쥐가 아니라 막걸리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창피해 어디다 대고 말 할 수도 없고 다시 술도가로 돌아가 자비로 술을 산 후 말이 아닌 몰골로 돌아온 나를 동료들은 영문을 모르는 채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각해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야외에서의 발굴조사는 그저 신나기만 했고 잠깐 쉬는 시간에 인부들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잔은 그렇게 꿀맛 같을 수 없었다.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나 하루종일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하루 세끼를 먹는 것보다는 두끼를 더해 하루 다섯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도 농사 짓는 농부처럼 고단했기 때문에 그만큼 에너지원을 더 섭취했다. 아침과 점심 식사 사이에 한번, 점심과 저녁 사이에 한번 새참을 먹는 것이다. 빵이나 국수 또는 막걸리가 주메뉴였다. 지금도 발굴현장에서는 반드시 새참시간이 있다. 새참은 수십년을 살아남은 발굴 현장의 전통이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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