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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인천발 한국 1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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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건물에서 바라본 인천항과 구시가지.

인천엔 수많은 '한국 최초'가 있다.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 받은 것도 있지만, 때론 뚜렷한 사료가 없이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온 것들도 있다. 분명한 점은 많은 최초들 속에서 근대화 이후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애환을 엿볼 수 있다는 것. 이젠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인천의 '한국 최초'들을 간추려봤다.

정리=최민우.남궁욱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광고 - "아이나 노인도 속이지 않을 것이니 … "

인천에 들어와 있던 독일계 무역상 '세창양행'이 처음으로 근대적 광고를 했다. 1886년 한성주보를 통해서다. 2월 22일자 17쪽과 18쪽에 걸쳐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 世昌洋行 告白)'이라는 24줄짜리 광고를 게재했다. 내용인 즉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 시계, 호박, 유리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해 물품의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나 노인이 온다 해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희 세창양행의 상표를 확인하시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당시엔 광고를 고백이라고 했으니 과장 광고는 당연히 없지 않았을까.

광고뿐만 아니라 세창양행은 최초의 서양식 주택도 만들었다. 1890년께 현재 자유공원 부근에 건립된 사택이 그것. 건평 173평의 2층의 벽돌집으로 외벽은 회색을 칠하고 붉은 기와를 얹었다.

*** 쫄면 - 잘못 나온 냉면 면발이 대박

1970년대 초반 인천 중구 경동에 위치해 있던 '광신제면'에서 쫄면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려는 실험 정신과는 전혀 무관하다. 일종의 사고였다. 냉면을 뽑는 사출기의 구멍을 잘못 끼워 국수 가락이 굵게 나온 것. 이 굵은 면발은 냉면보다 덜 질기면서도 쫄깃한 맛을 냈다. 광신제면은 잘못 나온 굵은 면으로 음식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어 공장 앞의 분식점에서 이를 요리해 판매했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쫄면과는 요리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고추장 양념으로 비벼 만들었다는 점은 똑같다.

중구 인현동의 분식점 '맛나당'에서 주방장이 면이 쫄깃쫄깃하다고 해서 '쫄면'이라고 처음 부른 게 이름의 유래. 광신제면과 맛나당은 모두 없어졌다.

*** 축구 - 영국 수병들이 '신기한 공놀이' 전파

축구 전도사는 1882년 6월 제물포항에 들어온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수병들. 쇄국정책 때문에 제대로 상륙할 수 없었던 이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몰래 뭍에 내려와 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코쟁이'들이 벌이는 신기한 공놀이를 보려고 구경꾼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 관중 출현에 으쓱해졌던지 수병들은 경기를 마치고 축구공을 선물로 남기고 갔다. 덕분에 인천 사람들은 한반도를 통틀어 제일 먼저 축구 경기를 본 것은 물론 축구공을 차 보기까지 했다.

이렇게 한번 축구 맛을 본 인천 사람들은 곧 웃터골에 있던 공터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는 경인 축구전과 상하이 유학생 축구단 시범 경기(이상 1922년) 같은 중요한 경기들이 열렸다. 현재 중구 전동인 이 터는 제물포 고등학교가 차지하고 있다.

*** 사이다 - 1905년 미국 기계로 첫 생산

사이다의 역사도 얼추 100년이 됐다.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1905년 '인천탄산'이 신흥동 해광사 인근에서 창업했는데 미국식 제조기와 5마력짜리 발동기를 사용해 사이다를 생산했다는 것. 광복 후엔 인천탄산의 후신인 경인합동음료가 '스타 사이다'를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1916년 9월에 발행된 미국 월간지 '월드 아웃룩'엔 인천 사이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진이 나와 있다. 경인선 객차 전면을 덮은 광고는 '성인(星印.별표) 샴페인 사이다'와 '인천탄산수제조소'라는 상호가 보인다. 현재 인기 있는 사이다가 칠성 사이다인 걸 보면 성인-스타-칠성으로 이어진 사이다와 별의 인연은 처음부터 각별했던 모양.

*** 성냥 - 공장 여성 근로자들 큰 인기

국내에서 성냥을 처음 생산한 곳도 인천이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하에 성냥 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생산을 중단했는데, 그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1917년 10월 금곡리에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인천은 본격적으로 성냥 생산의 본거지가 된다. 특히 다른 일터보다 20대 여성 노동자가 많았다. 총각들의 관심이 많았던 것은 당연지사. 한국 전쟁 직후 군대에서 가장 유행한 노래가 '인천의 성냥 공장 아가씨'였다는 일화도 있다.

*** 호텔 - 일본어 아닌 영어로 손님 안내

일본인 호리 리기타로가 지은 벽돌 3층의 '대불' 호텔이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이다. 정확한 건립 연도는 불분명하나 1885년 인천에 발을 디딘 아펜절러 목사가 대불 호텔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이미 영업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서 짐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대불'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모시고 있었다. 호텔 방은 편안하고 넓었다. 식탁에 앉았을 때는 잘 요리되어 입에 맞는 외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혹자는 입에 맞는 외국 음식이란 문구를 인용, 우리에게 '숭늉'과도 같은 '커피'를 그 당시에 처음 맛보지 않았을까 추리하기도 한다.

대불 호텔은 이후 중화루란 고급 중국 요릿집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건물이 헐린 채 빈터로만 남아 있다.

*** 우체국 - 서울.인천 집배원 오류동서 '접선'

1884년 서울에 우정총국이, 인천에 우정분국이 생겼다. 서울 ~ 인천 간 최초의 근대적 우편 업무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우편 업무는 현재의 인터넷 세대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 매일 아침 9시에 서울과 인천 두 우체국에서 각각 집배원 한 명이 출발한다. 중간 지점인 오류동에서 만나 우편낭을 서로 교환하는 것. 서울과 인천에서 오류동까지 40리. 집배원의 걸음은 매시간 10리를 가도록 했고, 따라서 두 사람은 오후 1시쯤 접선(?)을 하게 된다. 우편낭을 교환하고 출발했던 우체국으로 돌아오면 이미 해가 질 무렵. 우편물을 주고 받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는 셈이었다.

도움 주신 분 : 조우성 인천시사 편찬위원, 인천 역사자료관 강덕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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