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퀴즈 세대와 토론 세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지난주 열린 ‘대학 토론배틀’ 8강전. 케이블채널 tvN(CJ미디어)에서 방영 중인 ‘백지연의 끝장토론’이 여름특집으로 준비한 대회라고 했다. 부산대와 전북대, 명지대와 이화여대 재학생 팀이 각각 맞붙은 이날 경기의 주제는 ‘21세기 외교-친미가 우선인가, 친중이 우선인가’와 ‘부자는 죄인인가’였다. 한 주제를 놓고 찬반으로 나뉘어 토론하는 방식은 다른 대회와 같았지만, 토론 내용의 ‘진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실제로 찬성·반대가 갈리는 주제를 선정하도록 배려한 점이 돋보였다. 시간은 전·후반 각각 40분과 중간의 작전타임 15분 등 총 95분. 축구경기와 흡사했다.

‘친미인가, 친중인가’와 ‘부자는 죄인인가’라는 두 주제 모두 애초부터 100% 찬성 또는 반대로 결론 날 사안은 아니다. 그러니까 토론 주제로 선정됐을 것이다. 첫 경기에서 대학생들은 한반도 주변 정세와 교역량, 역사적 경험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다음 경기에서는 부(富)의 축적 과정과 사회적 책임을 두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졌다. 공산주의의 낡은 역사발전단계론에 매달리다 결국 자기모순에 빠져 앞서 내놓았던 주장을 뒤집는 해프닝도 벌어졌지만, 그런 풍경조차 신선하게 느껴졌다. 경기 후 심사를 통해 승패가 결정되자 진 팀의 몇몇 여학생은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저 토론에 끼어든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솔직히 별로 자신이 없었다. 다른 기성세대처럼 나도 자랄 때 토론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성인이 된 뒤의 토론 경험도 일천하다. 어린 시절 또래와 말씨름하다 말문이 막히면 “그래, 니 X 굵다!”라며 엉뚱한 야유나 퍼붓기 일쑤였다. 힘이 센 아이는 몇 마디 오가지 않아 주먹부터 내밀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불합리하게 여겨져도 무조건 따르는 게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는’ 착한 아이의 자세였다. 그 시절 등장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게 TV의 ‘장학퀴즈’ 프로그램이었다(그러고 보니 강용석 의원도 장학퀴즈 출신이다). 순전히 지식의 양(量)만을, 광범위하지만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지식들을 요구하는 퀴즈대회였다. 깊이 있는 사고나 상대방과의 소통은 필요없었다. 심사 기준도 간단했다. 정답이냐 오답이냐, 주관식일 경우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만 하면 끝이었다. 그 어떤 문제도 정답이 없는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세상 일에는 정답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 같은 ‘퀴즈세대’는 사회에 진출하고 나서야 세상이 정답·오답만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 단답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대학생 세대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딱히 정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 정답이 여럿인 문제들과 씨름하고, 혼자 힘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나아가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을 익혀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강력한 설득력 못지않게 남의 좋은 의견에 기꺼이 설득당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지적 능력이다. 대립의 중간점을 찾아 멋지게 타협하는 능력은 국제무대에서 더욱 빛난다. 대학생 토론대회는 그런 능력을 기르기에 제격이라고 본다.

함께 심사를 본 철학자 탁석산씨에게 소감을 물어보았다. “요즘 대학생들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문제는 준비해 온 자기 얘기만 하면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아는 기성세대의 토론 방식이 잔재로 남아 있다는 것”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나도 공감한다. 대학생 토론대회, 앞으로 더 많이 열려야 한다. 젊은 ‘토론세대’들이 쑥쑥 커서 흑백논리로 뒤덮인 이 나라를 합리적으로 이끌어주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