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24. 필동 총격 사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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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1960년대 건설회사 전무 시절의 필자(右)와 당시 함께 일했던 최경환씨.

1964년 12월 26일 토요일이었다. 전날 크리스마스의 여흥이 채 가시지 않았던 나는 감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일찍 결혼해 올망졸망한 아이를 셋이나 둔 가장이었지만 이제 겨우(?) 스물아홉. 방구들만 지키고 있기에는 피가 너무 뜨거운 나이였다. 친구들과 낮에는 마작을 하고 밤에는 '무학성'이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놀 요량이었다. 주머니도 든든해 뭐 하나 꿀릴 게 없었다. 당시 나는 건설회사 전무 직함을 달고 있었다. 나를 끌어준 강OO 사장은 명동 시절에 만난 '인텔리 건달'이었다. 서울대 의대 예과까지 다닌 그는 집안이 부유했음에도 그저 한량기에 취해 주먹 세계에 흘러들었다가 손을 털고 건설회사를 차렸다. 내가 나중에 주한미군 건설 군납업을 하게 된 것도 그와의 인연 덕분이었다.

친구 집에서 한창 마작판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강 사장 차를 모는 운전기사가 울먹이면서 뛰어들었다.

"전무님, 큰일났어요. 사장님이 총에 맞았어요." 총기 사건은 생각할 수도 없던 때라 순간 '얘가 뭘 잘못 알고 이러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빨리 백병원으로 가보세요"라고 외치는 소리에 떠밀리듯 차에 올랐다. 병원에 도착하니 강 사장이 막 수술실로 실려가고 있었다. "형, 누구(짓이)야?" 라고 다그치니 "몰라" 라며 고개를 저었다. "태원아, 또 올지 몰라. 잘 지켜"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오후 강 사장 부부는 영화를 보고 서울 필동 집에 도착해 현관을 들어서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야, 강OO!"라고 부르기에 돌아보는 순간 총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총알은 척추 중추신경을 관통했고, 이후 강 사장은 하반신 불수로 휠체어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수술실 앞에서 나는 건달세계에 전설처럼 전해져오고 있는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른바 '시라소니 사건'. 동대문파 보스인 이정재가 부하 수십명을 동원해 선배인 시라소니(이성순)를 습격한 적이 있었다. 천하무적이었던 시라소니도 수에 밀려 부상을 입고 입원하게 된다. 살려둘 경우 후환이 두려웠던 이정재는 다시 부하에게 살해 명령을 내렸다. 그 부하는 병실에 숨어들었으나 시라소니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격투를 벌이다 손도끼로 시라소니의 발만 내리찍고 도망갔다.

잔뜩 긴장한 채 수술실을 지키고 있는데 얼마 뒤 거짓말처럼 복도 끝에서 사내 세 명이 수술실을 향해 걸어오는 게 아닌가. 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점퍼 차림에 내 또래로 보이는 그들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수술실 문을 밀고들어가려 했다. "뭐야 이거?" 반말로 막아서자 한 명이 "기자야"라며 나를 밀치고 들어가려 했다. "기자면 신분증 봅시다" "짜식이 무슨 소리하고 있어?" "정말 기자면 수술 끝나고 보면 되잖소?"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말이 점점 험악해지면서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

당시 상황에선 그들이 전혀 기자로 보이지 않았다. 기자를 사칭해 파견된 하수인이니 필사적으로 막아야한다는 마음 뿐이었다. 기자라면서 신분증은 고사하고 카메라도 없지 않은가. 병실에 있던 환자와 가족들이 나와 우리를 빙 둘러쌌다. 내가 완강히 버티자 마침내 자칭 기자들 중 한 명이 내 넥타이를 잡아당기면서 완력으로 나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박치기로 그의 코를 들이받았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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