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대상선 왜 모두 끼워넣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석연치 않은 가지번호=가지번호란 '가지를 친 번호'란 뜻으로, 문서접수대장 '연번(일련번호)'란의 1번과 2번 사이에 1-1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1번, 2번 서류를 접수한 뒤 나중에 그 사이에 접수한 문서가 나타날 경우 문서 접수의 순서를 지키면서 접수 사실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이런 형식을 이용한다. 즉 전에 접수한 문서를 뒤늦게 추가로 기재할 때 쓰는 게 가지번호다.

은행들은 통상 부서마다 문서접수대장을 비치하고 있다. 문서를 외부에서 받은 담당자가 이 대장에 기재하는데 접수한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매긴 뒤 발신자·문서번호·제목 등을 적는다.

문제는 2000년 6∼12월 현대상선에서 접수한 서류들의 기록은 예외없이 가지번호로 돼 있다는 점. 2000년 9월 현대상선 대출 건의 경우 '테니스 대회' 공문 밑에 가지번호를 달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상선 대출건 중 4천억원과 전혀 관계없는 2000년 5월의 1천억원 차입신청서만큼은 가지번호를 이용하지 않고 '761'번이라는 정식 번호로 기재돼 있다.

◇'흔한 일' 산은 해명=산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급하게 일을 처리한 후 문서접수대장에 기록하거나, 일의 진척 상황을 보아가며 접수 시점을 늦추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대출 신청자가 접수 자체를 대출 승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 대출 승인이 확정된 뒤에야 대출신청서를 정식으로 받아 기록하는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며칠 늦게 기록하는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산은 측은 또 "얼마나 급했으면 가지번호로 처리했겠느냐"며 "이 점만 봐도 대북지원이 아닌 유동성 지원용으로 대출금이 쓰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안 풀리는 의문='흔한 일'이라는 산은 설명에 대해 금융계에선 의문을 표시한다. 다른 기업의 신청서들을 가지번호로 기재한 것은 이 문서접수대장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유독 현대상선 건은 다 가지번호로 기재된 게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7건의 현대상선 기록은 여러 달에 분산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체가 거의 같다. 바로 앞 뒤의 다른 서류 접수 기록들과는 필체가 다르기도 하다.

여백에 적어놓았다는 것은 뒤늦게 추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추가한 시점이 언제냐가 중요하다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 2000년 당시 현대상선이 '산은 대출금은 우리가 쓴 게 아니다'라는 이유로 기록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정식 대출로 인정해 기록을 추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대상선은 당초 "정부가 쓴 돈이므로 갚을 수 없다"고 했다가 이 문제를 논의한 청와대 회의 이후에는 무슨 영문인지 더 이상 "못 갚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지난주 국감에서 증언했었다.

任의원 측은 "최근 4천억원 지원이 문제된 후에 기록을 수정해 꿰맞췄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문서접수대장은 외부 문서들을 접수한 즉시 일련번호를 지켜 기재하게 돼 있어 해당 기관과 외부와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주요 참고자료가 돼 감사원 감사 등의 점검 대상이기도 하다.

오는 14일 시작되는 감사원의 산은 감사에서 이 문제의 진상이 밝혀질지 주목된다.

허귀식 기자

ksline@joongang.co.kr

A. 유독 현대상선 관련 서류들은 예외없이 임시번호(가지번호)로 돼 있다.

B. 다른 건들은 여백이 충분히 있는 반면 현대상선 건들은 모두 여백에 적혀 있다.

C. 1∼7번 모두 현대상선 관련 기록은 한 사람이 같은 필체로 쓴 흔적이 보인다. 또 다른 항목들과는 필체가 다르다.

산업은행이 2000년 현대상선에서 받은 대출신청서류들이 산은의 문서접수대장에는 임시번호(가지번호)로 표기된 것으로 드러나 장부 조작 의혹이 일고 있다. 이 자료를 공개한 한나라당 임태희(任太熙)의원은 "나중에 급히 끼워 넣은 흔적이 역력하다"고 주장했다. 산은 측은 그러나 "조작한 것 없다"고 부인했다. 이에 따라 조작설의 진위를 가리는 것이 대북 비밀지원 의혹의 진상 규명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