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8월에 돌아보는 이념 분열 백 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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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 사회 내부의 분열은 지역·계층·세대·정당 등 여러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대결의 원인이라면 지난 한 세기에 걸쳐 심화된 이념의 분열을 꼽아야 할 것이다. 근자에 탈(脫)이념을 내세우며 실용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것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의 궁극적 원인을 덮어 버리려는 우(愚)를 범할 뿐이다. 인간은 국가나 공동체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보편적 기준을 찾게 되며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그 규범적 기준에 구체적 의미를 부과하는 이념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수천 년 지켜온 민족의 독립과 518년을 유지한 조선왕조의 주권을 한꺼번에 상실한 충격 속에서 추진된 독립운동은 폐쇄성을 탈피하고 세계사의 흐름에 동참해야 되겠다는 각성과 더불어 ‘어떤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작업이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정치이념의 선택인 동시에 새 정치체제의 모델을 찾는 일이었다. 프린스턴대 출신의 이승만 박사가 1919년 3·1운동에 이어 상하이(上海)에서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것은 독립운동의 주류가 선택한 새 나라의 이념과 모델이 어떤 것인지를 극적으로 보여 줬다. 즉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민주주의와 서구 민주국가들이 바로 그 이념이며 모델이었다.

한편 1917년 레닌이 주도해 제정러시아 체제를 단숨에 붕괴시킨 볼셰비키혁명이 우리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이념과 체제의 모델로 등장했다.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과 독재를 주창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공산당 독재체제를 구축한 소비에트연방이 새로운 모델로 민주국가 모델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독립운동기의 두 흐름의 대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 냉전의 주역이 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진주하게 되면서 남북 두 체제와 이념의 대결 구도로 오늘에 이르게 됐다.

해방 정국의 혼란으로부터 6·25전쟁을 거쳐 천안함 사태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이 겪어 온 우여곡절은 쉽사리 정리하기 어려운 역사의 대하드라마였다. 다만 그 결과는, 특히 남과 북이 도달한 오늘의 실상은 선명하게 그들의 상대적 위치를 부각시키고 있다. 한국은 세계사의 주류에 합류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뒀음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세계사의 흐름은 차치하고 러시아·중국·베트남 등 공산당이 통치하는 국가들의 변화 과정과 견줘 봐도 완벽한 유일 예외 체제로 남아 정치적 경직화는 물론 경제적 파탄으로 신음하고 있다. 독립운동기에 꿈꾸던 새 나라의 이념과 체제는 실종되고 왕조적 권력 구조와 군국주의적 통제 시스템으로 주민들의 복지 수준을 위험 수위에 매어 놓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북한 체제와 이념을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렇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이념적 분열의 저변에 아직도 남북 대결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과거사 속에서의 언행과 인연들에 얽매여 버릴 수 있는 인간의 속성과 지(知)적 경직성으로 말미암은 지성의 저속 운행이 역사 진전의 빠른 속도를 뒤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지적 경직성의 한계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수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과 민족사회의 기본 가치를 보전하는 데 있다면 북한 동포의 가장 기본적 인권, 즉 그들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보수가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규범의 실천 사례는 독일 통일의 경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보의 경우 한반도의 특수성을 내세워 국제적 진보 진영의 보편적 원칙을 외면하는 당혹스러운 함정에서 하루속히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인권옹호·반독재·반핵이란 원칙을 확고히 천명해야 분배의 정의를 비롯한 진보적 목표에 무게를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특히 교조화된 신념 안에 갇혀 있는 이념론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젊은 세대들에게나마 그들이 추구하고 싶은 이념과 정치체제의 모델을 넓은 지구촌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아량을 베풀어 주기 기대해 본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