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존 애덤스·나폴레옹·레닌도 영감, 시대 초월한 권력 가이드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7호 19면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1972년 진보적 평론지인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과 인터뷰했다. 상대는 전설적인 저널리스트인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였다. 키신저는 이 인터뷰를 ‘가장 당혹스러운 인터뷰’로 기억한다. 자신의 정치 철학을 설명하는 키신저에게 팔라치는 이렇게 대꾸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장관께서 미국 대통령에게 미친 영향이 아니라 마키아벨리가 장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가 더 궁금해지는군요.”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1> 마키아벨리 『군주론』

키신저는 자신이 ‘마키아벨리주의자(Machiavellian)’가 아니라는 점을 극구 강조했다. 사전적 의미에서는 ‘마키아벨리주의자=권모술수주의자’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영미권에서 사탄·악마를 뜻하는 ‘올드 닉(Old Nick)’은 마키아벨리의 이름인 ‘니콜로’다. 키신저가 국제정치학자로서 현실주의(realism) 학파에 속하며, 근대적 의미의 정치 현실주의가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키신저는 ‘마키아벨리주의자’가 맞다.

키신저뿐만 아니라 미국 외교정책을 다루는 대부분의 사람은 마키아벨리 사상의 영향권 내에 있다. 미국 국제정치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이상주의나 자유주의라기보다는 마키아벨리적 전통에서 출발한 현실주의이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의 핵심 문헌 중 하나는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데이 마키아벨리(1469~1527)가 쓴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근대적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한 책이다.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대해 다룬 군주론으로 마키아벨리는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인정됐다. 사회학계에서는 몽테스키외가 아니라 마키아벨리에게 최초의 사회학자 타이틀을 부여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가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그가 정치를 ‘정치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도덕·윤리·종교로부터 정치를 분리해 냈다. 일반인의 오해와 달리 도덕에 있어서 마키아벨리가 추구하는 바는 ‘배덕주의(背德主義·immoralism)’가 아니라 ‘초(超)도덕주의(amoralism)’였다.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나쁜 짓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정치의 세계에서는 도덕의 잣대가 일상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신(神)의 개입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머스 홉스(1588~1679)보다 한 세기 앞섰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인이 할 일은 오로지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것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군주가 할 일은 오로지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항상 대비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의 시대적 상황 덕분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교황이 유부녀를 정부(情婦)로 두는가 하면 세속 군주로서 전쟁을 수행하던 시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200여 년간 국가와 사회를 휩쓸던 북부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세속화가 대세였다. 또한 사회의 종교적·도덕적 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졌기에 정치나 정치 도덕의 독자성에 대해 오히려 자유롭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한낱 ‘잔혹한 사이코패스’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체사레 보르자(1475~1507)의 통치 행위를 마키아벨리는 오로지 정치적 현실성을 잣대로 평가할 수도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항상 새롭게 조명되는 사상가다. 역사가 아이제이아 벌린은 72년 군주론에 대한 주요 해석이 적어도 25개는 된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를 재조명할 때 필요한 것은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의 면모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왜 공화주의자였을까.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조건으로 요구한 것은 과감함, 용기, 융통성을 발휘하는 비르투(virtu)였다. 비르투는 ‘남성적인 용감성(manly prowess)’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역사 속에서 비르투를 완벽하게 갖춘 정치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로마사 논고으로 불리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 번째 10권에 관한 논문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속에 사는 정치적 인간이 정치 제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인지에 대해 성찰했다. 마키아벨리의 결론은 국민의 정부가 군주의 정부보다 낫다는 것이다. 국민이 군주보다 신중성·안정성·판단력의 면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또한 갈등이 좋은 것이라고 봤다. 로마제국의 경우처럼 갈등이 제도화된 경우 갈등은 자유와 국가의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토론의 힘도 믿었다. 토론이 가장 현명한 행동과 가장 자질 있는 지도자를 선별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서 이상주의 철학자인 ‘젊은 마르크스(Young Marx)’와 정치경제학자·혁명가인 ‘늙은 마르크스(Old Marx)’의 차이점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처럼, 권모술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와 공화정이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는 ‘로마사 논고의 마키아벨리’의 상이함에 대한 논란이 학계에서 계속되고 있다. 공화주의자였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던 마키아벨리에게서 오늘의 민주주의에 도움을 주는 내용을 끄집어내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다.

마키아벨리에게서 참조할 만한 점 중 하나는 그의 방법론이다. 그는 엄정하게 철학·사학의 방법론을 구사하지는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역사에서 인용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사례를 잘 끄집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철학자도 사학자도 아니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저작에 대해서는 “체계성이 없고,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이다”는 평가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론을 추구했기에 체계성·일관성을 위해 현실과 유리된 이론을 만들 수 없었다. 이러한 방법론적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훗날 1급 철학자·사학자·사회과학자들이 그의 주장과 씨름해 왔다. 현실 세계에서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좌파·우파 모두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뿐만 아니라 나폴레옹·레닌·스탈린·카스트로도 군주론에서 영감을 얻었다.

현대 정치학은 엄격하게 과학적인 방법론을 요구하다 보니 정치학이 ‘현실을 바꾸는 정치학’ ‘일반인도 이해하는 정치학’의 길에서 멀어진 감이 없지 않다. 어쩌면 마키아벨리가 구사한 수준의 ‘느슨한’ 방법론이 필요한지 모른다. 엄격한 방법론이나 검증 과정이 부과되지 않으면 마키아벨리처럼 가설(hypothesis)의 활발한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설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문을 열어두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군주론을 다시 볼 이유 중 하나는 16세기 이탈리아가 21세기 한국에 시사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마지막 장에서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비전을 그가 주군으로 삼으려고 한 로렌초 데메디치에게 제시했다. 당시 프랑스·스페인·영국은 민족국가로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이탈리아는 나폴리·밀라노·피렌체·베네치아·교황령으로 분열돼 있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프랑스·스페인·독일의 침공을 받았으며 동맹국 선정이 잘못된 경우에는 나라가 위협에 처하기도 했다. 외교 사절로 파견됐을 때 종종 무시당했던 마키아벨리는 자주 국방과 이탈리아 통일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다.

마키아벨리는 지금 성십자가 성당에 누워있다. 마키아벨리의 묘비명은 ‘그 어떤 찬사도 이토록 위대한 인물을 찬양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성십자가 성당에는 마키아벨리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갈릴레오·로시니가 묻혀 있다. 성십자가 성당은 ‘이탈리아 영광의 전당(殿堂)’이라고도 불린다. 1913년판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평범한 그리스도교인으로 사망했다. 신부를 불러 죄를 고백하고 신의 용서를 받은 뒤 하늘로 떠난 것이다. 전형적인 르네상스형 인간으로 외교관·정치철학자·음악가·극작가였던 마키아벨리는 부인과 6명의 자녀를 둔, 가정에 일면 ‘충실’하면서도 지독한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