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7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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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말마다 서울 인근의 산으로 암벽 등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토요일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산행할 준비를 꾸려가지고 돈암동 전차 종점으로 달려나갔다. 거기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북한산이나 도봉산으로 올라갔다. 북한산은 전면을 붙고 나면 대개는 싱거워서 더 이상 오르지 않게 된다. 역시 암벽은 도봉 쪽이 다양하고 난코스도 많았다. 선인 남측 후면 전면의 코스가 모두 다양했고 연이어 만장봉까지 이어졌다. 새벽부터 서두르면 선인봉 만장봉을 오르고 나서 연이어 주봉까지 맛보기로 붙어볼 수 있었다. 그러고는 거기서 오봉으로 가서 오르고 나서 벽제 쪽으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북한산까지 이어진 연봉의 등줄기를 타고 우이암까지 가서 잠깐 동안에 올랐다가 우이동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학교를 벗어나서 또래들과 함께 산 속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지내는 일은 정말로 숨통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숲 사이로 새어드는 달빛이며, 텐트 위로 떨어지는 밤비 소리를 들으며 잠들지 못한 날도 있었고, 새벽에 추위에 떨며 일어나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짓기 시작하면 구름이 숲 위로 서서히 올라가 바위 봉우리를 감싸다가 흩어지곤 했다. 어느 때에는 바위 봉우리에서 발 아래 펼쳐진 구름 바다를 내려다보며 하마터면 몸을 굴려 내려 뛸 뻔했던 적도 있었다. 택이와 나는 한 학년 차이가 있었지만 별로 말은 많이 나누지 않았어도 깊은 사이가 되었다. 어느 때에는 산악 선배들이 알면 호된 기합을 받아야겠지만 눈이 강산같이 내린 겨울 달밤에 선인 전면을 붙은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요술처럼 바위의 크랙과 홀드가 모두 자세히 보였다. 맨손으로 바위를 잡는데도 어쩐지 차갑지 않았고 바람도 포근했다. 달은 선인봉 위에 높다랗게 떠 있었다. 눈 덮인 숲은 요를 깔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나는 자일이나 하켄 같은 장비 없이 맨몸으로 암벽에 붙기도 했는데 산을 아는 선배들에게 걸리면 그야말로 혼이 날 일이었다.

어느 점심 시간에 꾀꼬리 동산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앉았는데 택이가 다른 상급생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는 김성진이라는 녀석이었다. 성진이는 물들인 미군 작업복 바지를 교복 대신 입고 있어서 옆으로 불쑥 튀어나온 호주머니가 보였다. 그는 택이가 나를 소개하자 거침없이 말했다.

-저 눈매 봐라. 차암 말 안듣게 생겼네.

나는 그냥 웃기만 했고 그가 다시 덧붙였다.

-산에는 왜 올라다니고 지랄들이냐. 거기 올라가면 누가 뭘 준대?

-주는 게… 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성진이는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다부진 체격이었고 총명한 눈을 자주 깜박거렸다.

-그게 뭔데?

-부시기요.

나는 엉뚱하게 담배 얘기를 해버렸고 그가 한참이나 웃어댔다.

-얘 봐라, 제법 말할 줄 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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