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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한가위>태풍 지나간 고향에도 따스한 情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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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추석은 가을의 문(門)이다. 하늘은 파랗게 파랗게 높아만 가고 먼 산도 확 트여 이마 앞으로 다가온다. 맑고 삽상한 바람을 피부가 먼저 알아 사람과 사연들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웬만큼 훈훈한 이야기에도 눈물이 핑 도는 순수의 계절이 가을이다. 이 가을의 입구, 추석에 마음이 추운 사람들이 있다. 적당히 찬 공기에 홑이불 자락 끌어당기며 잠자기 좋은 이 계절에 몸마저 시린 사람들이 많다.

추석은 추수다. 봄·여름 뿌리고 열심히 가꾼 것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한다.농가 앞마당에서는 풋풋함이 채 가시지 않은 햇곡식들을 타작하고 울타리·지붕에서는 호박·박이 둥두렇게 익어간다. 너른 들녘에서는 벼며 잡곡들이 황금물결을 이뤄 익어가며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이 결실의 계절 추석에 거둘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수십년 쌓아온 것마저 태풍에 날려버리고 텅텅 빈 사람들이 많다.

추석은 꽉 차오름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우리 속담처럼 좋은 것들만 꽉 차올라 더없이 좋은 날이다.

달도 꽉 차올라 달무리도, 아낙네도 둥글게 둥굴게 강강술래 하는 밤이 추석이다. 이 모든 것이 원만한 계절에 허허로운 사람이 있다. 한가위 달을 텅 빈 것으로,차라리 잘 구워진 찐빵처럼 바라보는 빈 마음,빈 손의 사람들이 많다.

추석은 축제다. 논밭에 터를 둔 우리 민족에게 일년 중 가장 큰 축제가 추석이다. 각자 거둔 것만큼씩 갖고 우리는 논밭의 고향을 찾는다. 갓 수확한 햇곡식 지고 이고 어른 집을 찾고 선물꾸러미 바리바리 싣고 고향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나눠주고 노래하고 춤추며 인정의 축제를 벌인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인가, 너도 나도 풍족한 잔치 벌이려 고향을 찾는 추석에 돌아갈 집을 잃은 사람이 있다. 맞이할 집도, 성묘할 묘소도 태풍에 앗긴 뼈아픈 사람들이 많다.

추석은 다시 텅 비어가는 계절이다. 지난 계절의 꽃도 열흘 간 붉지 못했고 달마다 달도 차면 기울었다. 이 꽉 차올라 더할 수 없이 좋은 때 텅 빈 계절을 준비하는 것이 추석이다.

노랗게 풍요로 물들인 들녘의 것들을 다시 대지에 다 나눠주고 빈 손으로 이 계절은 겨울 속으로 간다. 꽉 참에서 텅 빔으로 넘어가는 이 추석에는 특히 아낌 없는 나눔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꽉 참도 텅 빔도 한 통속이라며 모든 사람 또한 한통속이니 인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인정으로 텅 비어갈 계절을 예감하기에 추석은 이래저래 우리들의 가장 큰 축제다. 모두모두 풍요롭고 사람 사는 맛 나는 추석 보내시길.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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