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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개인전을 며칠 남겨두고 있다. 벌써 열세 번째 전시회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처럼 허둥지둥 정신이 없다. 바쁜 와중에도 나는 "도대체 이 일을 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라고 내 자신에게 끝없이 묻고 또 묻는다.

배울 만큼 배웠고 경제적으로도 남부럽지 않다는 사람들조차 그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림 없이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그림은 '없어도 그만이고, 있어도 그만'인 정도가 아니다. 아예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술에 대한 무식을 드러내놓고 자랑하다가도, 어떤 그림이 돈이 된다는 정보가 있을라치면 주식 투자하는 마음으로 미술계를 기웃거린다. 그들은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보니 한풀이하는 식으로 소비하고 또 소비할 뿐이다. 그 밖의 것은 별로 관심이 없다. 슬픈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다.

얼마 전 뉴욕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의 사무실에 놀러갔었다. 다방면에 엄청난 식견을 갖고 있는 친구였다. 그의 문학적 조예는 전문가 빰칠 정도이고, 취미생활도 폭넓은 친구다. 그런데 막상 사무실을 장식한 그림들은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동양화와 서양화가 서로 연관도 없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직업 작가의 그림과 이발소에나 걸리면 딱 어울릴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거침없이 문제를 지적했다. "이 곳이 자네의 개인 공간이라면 상관하지 않겠지만, 공적인 장소라면 다르다. 고객들, 특히 외국인 고객들의 경우는 아마도 다시는 자네 사무실을 찾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심리적으로나 외관적으로나 안정되지 못한 사무실임을 금방 간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이나 음악 등을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몰아세우고 박대하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 고작 아름다운 것, 아니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게 분칠하고 각색하는 것 정도로만 볼 것이다. 그들은 예술가를 생각할 때 고작 여자나 발가벗기거나 멋진 풍경이나 그리는 정도의 한가로운 자들쯤으로 치부할지 모른다.

이래저래 작가는 예외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 가깝게 가면 갈수록 속화되고,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추상화돼 작가의 존재는 모호해진다. 따라서 작가는 본의 아니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 끼일 수밖에 없다. 아니, 자꾸만 서로 멀어지려는 현실과 이상 양쪽을 모두 꽉 붙들어 매고 견뎌야 할 중재자이자 화해자가 바로 작가이다.

이번 전시회 작품으로 가구를 만들었다. 화가가 가구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외로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보통 가구는 아니다. 매향리 미 공군 폭격장에서 주워 모아둔 폭탄 잔해물로 만든 특별한 가구다. '군함을 녹여 보습을 만들자'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는 병영 국가, 전국토가 군기지나 다름없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할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 것이다.

이번 전시회를 위한 작업은 그러한 현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싸움 자체를 무력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저항의 다음 단계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철의 극한, 전쟁과 죽음의 무기로 전락한 쇠의 운명을 평화와 상생을 위한 이기로 되돌리자는 것이다.

나는 꿈을 꾼다. 그 꿈이 이뤄지든지 이뤄지지 않든지 상관치 않고 꿈을 꾼다. 꿈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 꿈은 이뤄지면 더 이상 꿈이 아닌 것, 꿈은 꿈대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꾼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예술의 아름다운 자리매김을 위해 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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