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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세계중심부 진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이창동 감독은 올해 월드컵 한국대 이탈리아전에서 (연장전에) 골든골을 넣었던 안정환 선수처럼 뛰어난 기량을 가진 감독이다."

지난 8일(현지시간) 폐막한 베니스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이 감독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하자 이탈리아의 유력 좌익지(紙) '일 마니페스토('선언'이라는 뜻)'는 이색적인 평을 실었다. 폐막을 이틀 앞두고 막바지에 처음 시사회를 가진 '오아시스'가 다른 20편의 경쟁작들을 제치고 '대역전극'을 펼친 걸 빗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감독상 수상은 월드컵 4강 진출로 한국 축구가 전 세계에 강한 인상을 심었던 것과 비견할 만한 '사건'이라 하겠다. 지난 5월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데 이어 잇따라 세계 3대 영화제 중 두 곳에서 주요 상을 따냄으로써 한국 영화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동안 다른 아시아국가들, 즉 일본이나 이란·대만·중국의 예술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밀린 편이었으나 이제 그 격차가 상당히 줄었다는 걸 이번 수상으로 확인하게 됐다.

임권택·이창동 외에 홍상수('생활의 발견')·김기덕('나쁜 남자')·허진호('봄날은 간다') 등 소위 '작가영화'를 생산하는 일군의 감독군이 형성돼 비상업적 영화 쪽에서 세계의 중심부로 성큼 들어서게 됐다.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하고 20여년이 지난 87년에야 '씨받이'(임권택)로 강수연씨가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을 만큼 한국 영화계는 한동안 세계 영화계의 변두리이자 '잊혀진 존재'였다. 89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을 때도 '예외적으로 걸출한 한 인물'에 의한 성과이지 한국영화의 쾌거로 해석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러다 97년을 기점으로 매해 적어도 3편 이상이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영화가 제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는 우선 내적으로 한국 영화의 '힘'이 커진 덕분이다. 90년대 이후 상업영화 쪽에서 '결혼이야기''쉬리''친구' 등이 성공하면서 '한국 영화도 볼 만하다'는 인식이 퍼졌고 이에 영화에 투자하려는 자본이 풍부해지면서 다양한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특히 영상문화에 익숙해진 유능한 젊은이들이 영화 쪽으로 쏠리면서 참신한 작품이 나올 수 있게 됐다.

둘째로는 국제영화인들과의 인적 네트워크가 탄탄해졌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올해로 6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부천·전주영화제 등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영화제를 통해 각국의 주요 영화 관계자들을 초청하고 또 초대받음으로써 상호 유대가 두터워졌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영화를 제대로 소개하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셋째로 외부요인으로는 유럽 영화인들이 90년대 이후 아시아 시장에 대한 관심을 계속 높여왔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영화 미학이나 영화시장이 한계에 달했다는 인식을 하게 된 이들은 눈을 동쪽으로 돌리게 됐다.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중국의 지아장커나 장이머우,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 등은 유럽 영화가 발견한 감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턴 임권택·박광수·장선우 감독에 주목했던 유럽 영화인들은 최근 들어 홍상수·김기덕 등 한국의 소장 감독들에게 조명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부요인도 한국 영화가 10여년간 쌓아온 '내공'이 받쳐주었기 때문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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