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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왕국'통치하는 女作家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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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10년간 전파를 탄 TV프로그램 중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20개를 고르면 그 중 11개가 드라마다.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이 사세를 좌우한다"는 방송가의 속설이 농담만은 아닌 셈이다. 현재 시청률 1위도 MBC '인어 아가씨'다. 마침 주인공(아리영)이 드라마 작가여서 방송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방송 작가 중에서도 드라마 작가는 여성들이 압도적이다. 같은 작가라도 영향력이나 원고료도 천차만별이다. '인어 아가씨'의 아리영을 만들어낸 임성한씨는 특A급 작가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여성 방송작가들의 현황과 함께 임성한씨 인터뷰를 싣는다.

◇현대 드라마는 여성들의 아성=해방 전후 우리 드라마를 이끈 1세대 작가는 대부분 남자였다. 김희창·유호·김영수·최요안·한운사·신봉승씨 등. 남성 편중 현상은 1968년 김수현씨가 극본 공모를 통해 데뷔하면서 조금씩 양상이 바뀐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김포천 호남대 교수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펄떡펄떡 뛰는 생선 같은 싱싱한 대사가 단연 돋보였다"고 술회했다. 72년 4백11회나 방송된 일일 연속극 '새엄마'(극본 김수현) 이후 홈 드라마가 봇물을 이루면서 여성 작가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가정 내 인물 간의 세밀한 심리 묘사는 역시 여성 작가가 제격이기 때문이었다.

한국방송작가협회에 따르면 12일 현재 협회에 등록된 1천3백89명의 방송 작가 중 드라마 작가는 2백66명. 이중 1백73명(65%)이 여성이다. 30대까지로 연령대를 한정하면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84%로 높아진다. 젊은 여성작가군이 두텁다는 말이다. 올해 새로 입회한 드라마 작가 17명 중 남자는 단 한명. 심각한 여초(女超)현상이다.

SBS '명랑소녀 성공기'를 쓴 남성 작가 이희명씨는 "가정 내 일상사를 주 시청자인 여성의 입맛에 맞게 표현하는 데에는 여성 작가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작가협회의 한 관계자는 "방송작가와 지망생의 수가 늘어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성공에 이르는 문이 더욱 좁아진 것이다. 오락 프로그램과 달리 드라마는 정식 데뷔하기까지의 과정이 고통스럽다. 생계를 주로 책임져야 하는 남성으로선 그 가능성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어떻든 여성 작가의 역할은 앞으로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여성작가들의 히트작 행진=김수현씨를 빼놓고 한국 드라마사를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만큼 많은 히트작을 낳았고, 이를 통해 방송 작가의 위상을 높였기 때문이다. 92년에 방송된 '사랑이 뭐길래'는 역대 프로그램 평균 시청률 중 가장 높은 59.5%라는 경이적 수치를 기록했다.

이밖에 50, 60대 여성작가들로는 박정란('울밑에선 봉선화''백정의 딸')·박진숙('아들과 딸')·김정수('전원일기''그 여자네 집')씨 등이 있다. 40대 작가로는 송지나('모래시계''카이스트')·정성주('장미와 콩나물''아줌마')·조소혜('첫사랑')씨 등이 주역이다. 주목할 것은 80년대 후반부터 대거 등장한 386세대의 젊은 작가군이다. 노희경('거짓말''화려한 시절')씨를 비롯, 정성희('국희')·김규완('피아노')씨 등이 싱싱한 감각을 드라마에 녹여내고 있다.

◇사극은 남성작가 전유물=사극 분야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방송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대하 드라마인 사극은 남성 작가들의 독무대다. 60년대부터 활동해온 신봉승씨에 이어 최근 사극 바람을 몰고온 '태조 왕건''제국의 아침''야인시대'의 작가 이환경씨, '장희빈''홍국영'의 임충씨, '허준''상도'의 최완규씨 등이 있다. 사극의 경우 남성적인 스케일, 지구력이 필요한 집필과정의 특성 등에 따른 것이다.

사극 이외의 드라마에서도 '서울의 달'의 김운경씨 처럼 인기를 끌었던 남성 작가들이 있지만 최근엔 여성 작가들의 기세에 눌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여성 편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한 남성 원로 작가는 "아무래도 여성 작가들이 쓰다보니 현재의 드라마는 지나치게 가볍고 여성화돼 있다. 사극을 제외하고는 선 굵은 드라마들이 거의 실종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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