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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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서울이 그리워지나

-신경림(1935~) '파장(罷場)' 중

1970년 작품인데 내용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호남의 가뭄 얘기'를 '영남의 물난리 이야기'로만 바꿔놓으면, 그해 여름풍경은 고스란히 2002년 오늘 어느 시골 읍내의 그것이 되리라. 얼굴만 봐도 흥겨운 이들이 '학교 마당'이나 정자나무 아래, 혹은 손님 없는 '이발소'에들 모였으리라.'소주에 오징어를 찢으며' 못난 친구의 일을 염려하리라. 공연한 시비 끝에 서로 잘났다고 삿대질도 하리라. 그리워할 것도 없는 서울을 그리워하리라.

윤제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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