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윤제림 '심청전' 外:침묵과 절제의 언어로삶 감싸는 인간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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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심각하고 엄숙한 시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라든가 기발한 상상력을 담은 시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때가 있다. 윤제림은 바로 그런 시 읽는 기쁨을 듬뿍 안겨주는 시인이다. 그는 여간해서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시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감정의 출렁임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그려낸 정경의 속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를 읽은 다음 다시 한번 되짚어 읽는 과정이 필요하다. 참으로 묘하게도 그의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재독(再讀)의 과정을 거치도록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의 시 '입국과 출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입국을 기다리는 나라가 나오는데 그 나라가 어디인지 처음에는 밝히지 않는다. 마지막 행에 이르러 "마흔다섯 살의 장례식엘 다녀왔다"는 구절이 나옴으로써 그 나라가 저승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그 나라의 정체를 알게 되면, 앞부분에 나오는, 전쟁이 한창인 나라에서 백오십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입국을 기다리고 있다거나, 올해만 해도 자기 주변에서 일곱명이 그리로 떠났다거나, 내가 간다면 마중 나올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구절의 묘미를 비로소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반성적 명상의 기회까지 갖게 된다.

그의 시가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삶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정겨운 시선이다. 최근 그의 시에 나오는 세상살이에 대한 연민어린 정감과 애정어린 눈길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잔하고 감미로운 감동의 파문을 자아내게 한다.

'심청전'은 열다섯살쯤 되는 여자애가 장님 아버지와 꽃구경을 나와 꽃이 핀 정경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해 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순한 장면을 시로 승화시키는 것은 대상을 이야기하는 심미적 구성 방식이다. "봄꽃 피어나는 것 열댓번쯤 보았을 처녀애가, 꽃피는 구경 한번도 못해본 아버지 손을 붙들고 꽃밭엘 나왔습니다"로 시작되는 첫 구절은 이 시의 독특한 미학적 기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직접적인 언술을 피하고 연상과 암시를 통해 삶의 페이소스를 펼쳐내는 방법이다.

'강'에는 퇴락한 유원지 매점과 적막한 강물을 배경으로 해가 저물도록 지갑 속의 사진을 꺼냈다 넣었다 하는 한 사내가 나온다. 어떤 사연에 의한 것인지는 일체 언급하지 않은 채 하나의 실루엣만을 보여준 셈인데, 그 장면에서 우리는 생에 대한 연민이 따스한 온기와 결합되는 시적 융합을 체험하게 된다.

'철수와 영희' 역시 재독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철수와 영희가 나오고 창식과 숙자가 나와서 처음에는 어린이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시의 끝부분에서 철수와 영희가 일흔두엇쯤 된 부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노부부라는 점을 알고 앞부분을 다시 읽으면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생채를 띠고 빛나며 정겨운 시적 흥취가 조성된다. 칠십대의 노인을 철수나 영희로 호칭한 것도 조금도 불경스럽지 않고, 늙을수록 어린애가 된다는 시각에서 보면 이것도 우리의 쓸쓸한 생을 감싸는 인간주의적 정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윤제림의 시는 이처럼 침묵과 절제로 생의 온기를 드러내는 묘법을 지니고 있다.

이숭원<문학평론가>

<약력>

▶1959년 생

▶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사랑을 놓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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