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美외교가의 충고… 생존을 위한 손자병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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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9·11 테러 직후 각국 정부는 미국의 아픔을 동정하는 듯 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이를 '미국의 정의'에 대한 세계의 전폭적 지지로 해석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최근 이라크를 공격하겠다며 2차 걸프전을 시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유럽과 제3세계 국가들이 오만한 미국을 대하는 경계심은 늦춰지지 않고 있다. "유럽인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접착제는 미국에 대한 집단적 우려다" "미국은 자신의 국가 이익과 글로벌 차원의 이해를 혼동하기라도 한 양, 다른 나라는 아랑곳 않고 일방적으로 정한 정책을 추진하려 한다"는 평가가 이 지역 학자와 언론들 사이에 지배적이다.

미국 안과 밖의 시각은 그만큼 차이가 크다. 9·11 이후 노엄 촘스키의 『촘스키,9-11』(김영사),크리스토퍼 히친스의 『키신저 재판』(아침이슬) 등 미국 외교 정책을 신랄히 비판하는 책이 미국 이외 지역에서는 인기를 얻고 있다. 반면 뉴욕 타임스 등 미국의 주류 미디어들은 애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 외교계의 이너서클 중 한 사람으로서 미국 안과 밖의 차이를 직시하고 있는 이가 현재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학장이자 국방차관보를 역임한 조셉 나이다. 그는 "미국의 쇠퇴주의와 불멸주의 양쪽의 오류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핏 보면 진보나 보수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산술적인 중도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책은 9·11 1주년을 전후한 지금의 시점에서 차분한 제3의 성찰 계기로 유효하다. '팍스 아메리카나' 분위기와 다른 적절한 자기반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책에는 테러 이전에 미국은 스스로를 무적 국가라 여기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공화 양당은 외교 정책보다 미국 내 이익집단의 목소리에 더 관심을 가지고 미국민들은 미국의 불패 신화를 철석같이 믿어왔다. 이것을 불멸주의의 양상으로 지목한다.

나이는 미국 쇠퇴주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지나치게 신중한 외교적 행동은 미국의 영향력을 갉아먹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는 "미국에 대한 전세계의 평가가 어떤지 똑바로 쳐다보고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을 방법을 강구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려면 여전히 미국이 세계의 보안관 역할을 하려 한다는 비판이나, 왜 파워에 목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박은 일단 접는 게 낫다. 나이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이자 애국적인 미국 학자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역사학자 폴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미국 쇠퇴론'이 대세를 얻었다. 식민지 시대 스페인과 영국처럼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눌려 미국도 쓰러질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이 나이다. 그는 『21세기 미국 파워』(한국경제신문사)에서 21세기에도 미국이 여전히 세계를 주도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90년대 들어 과연 그의 말대로 정보 혁명을 바탕으로 한 기술적·경제적 우위로 미국의 힘은 사그라지 않았다. 이쯤되면 나이의 분석력은 신뢰를 얻을지 만하다.

나이는 미국의 힘이 어느 나라의 도전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크지만 전세계적 테러 행위나 핵 확산 같은 문제를 홀로 해결할 정도로 강대하지는 못하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미국 힘의 역설이다. 일방적인 외교보다 다원주의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이는 미국 힘의 원천을 두가지로 나눈다. 군사력·경제력을 주축으로 한 하드 파워와 문화·이데올로기·제도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 파워가 그것이다. 미국은 하드 파워를 당근과 채찍으로 이용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헤게모니 유지 비용이 너무 크다. 다른 나라의 반발심은 커질 것이며 이들 간의 협력체가 생길지도 모른다.

반면 소프트 파워는 어떤가. 독일의 주간지 디 차이트의 편집장 요세프 요페는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혁명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총칼에 의존해야 했지만 미국의 경우 뮌헨 시민도 모스크바 시민도 초현대성이 구현된 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런 문화적 부분뿐만이 아니다. 대인지뢰 반대 운동처럼 명분있는 의제 설정도 미국에 힘을 실어준다. 군사력·경제력 같은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힘이 소프트 파워에는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는 3차원 체스 게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상단 체스판에 자리잡은 것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미국의 군사력이다. 중간 체스판은 유럽·일본·중국 등 협상 대상이 다수로 늘어나는 경제력이다. 가장 복잡한 것은 하단 체스판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정부 통제를 받지 않는 초국가적 영역을 포함한다. 역설적이게도 정보 혁명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연장할 계기도 됐지만 집단·개인의 힘도 키웠다. 세계무역기구(WTO) 총회까지 무산시키는 비정부기구(NGO)의 힘을 무시할 수 없으며, 인터넷으로 정보 파급력이 극대화된 개인들도 변수가 되고 있다.

나이는 현실 인식이라는 첫 발자국은 제대로 뗐다. 미국의 우월성을 측정하는 전통적 잣대는 실속 없는 것이라고 입증하고, 군사력에 의지한 단극성과 헤게모니도 공허하다고 밝히고 있다.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밝힘으로써 그 힘을 연장하려는 '한수 위'의 외교 전략이 이 책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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