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돋보기] "집배원 소송서류 배달 잘못 국가가 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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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집배원이 소송 서류를 잘못 배달해 피해를 보았을 경우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2002년 4월 경기도 고양의 임야 5500여평을 산 김모(41)씨는 넉달 뒤 사기당한 땅을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에게 땅을 판 사람은 토지 사기단 이모(70)씨였다. 이씨는 땅 주인 최모(75)씨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가짜 매매계약서를 만든 뒤 이 위조 계약서를 근거로 법원에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을 냈다.

이씨는 최씨의 미국 주소 대신 국내 한 농가의 주소를 엉터리로 법원에 알려줬다. 가짜 주소지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는 "우편물이 갈 테니 잘 받아 보관해 놓아라"고 부탁했다.

집배원은 법원의 재판 관련 서류를 배달하면서 "최씨에게 전달해 주겠다"는 주민의 말만 믿고 송달통지서에 최씨가 직접 우편물을 받은 것처럼 기록했다. 자신이 소송당한 사실을 몰랐던 최씨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고, 법원은 이씨의 주장을 최씨가 인정(의제자백)하는 것으로 간주해 원고 승소 판결했다.

김씨는 이런 방법으로 등기부상 땅 주인이 된 이씨에게 속아 땅을 샀던 것. 그러나 최씨가 뒤늦게 자신의 땅이 사기당한 것을 알고 소송을 내 소유권을 되찾았고 김씨는 땅을 빼앗겼다. 공무원인 집배원의 실수로 땅 사기가 가능했다는 것을 안 김씨는 "땅값 4억4000만원을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서울고법 민사15부는 3일 "국가는 3억40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송달통지서에 정확히 기재하는 것은 집배원 업무의 기본 원칙"이라며 "특히 농촌의 주택에 다른 사람 명의의 소송서류가 송달되는 것은 이례적이므로 더욱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매도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며 김씨에 대해서도 20%의 책임을 물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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