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3>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42.貿協·商議 건설위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나는 브래지어 등 여성 속옷을 만들어 판매하는 제조업을 하고 있지만 원래 사업은 무역으로 출발했다. 6·25 전쟁 직후 부산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며 꿈을 키웠고 홍콩을 오가는 무역상으로도 활약했다. 무역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셈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무역사에서 1세대 무역상에 해당한다고 자부한다. 내가 1954년 세운 무역회사 '남영산업'이 두 해만 있으면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그런 때문인지 나는 한국무역협회와도 일찍 인연을 맺었다. 무역협회 상무이사로 선임된 게 63년으로 38세 때였다. 대부분의 이사들은 나보다 10년 이상 연상이었다.

나는 모두 31년 동안 무역협회 일을 했다. 상무이사로 10년, 부회장으로 21년 동안 일했고 94년부터는 비상근 고문으로 있으니 무역과의 인연은 평생 이어지는 모양이다.

70년부터는 상공회의소 일도 맡아 했다. 김기탁(金基鐸) 대한상의 부회장의 권유로 인연을 맺었다.당시에는 나처럼 무역협회 이사와 대한상의 의원을 중임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두 단체에서 주로 건설 쪽 일을 맡았다. 해방 전 만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토목과를 졸업한 학력과 만주 철도 복선공사에서 현장감독으로 일한 경험을 인정받았다고나 할까.

나는 두 단체의 건물을 모두 내 손으로 지었다.

"우리도 회관을 하나 마련합시다."

69년 서울 중구 회현동에 무역회관을 짓는 사업이 추진됐다. 회관 건립은 46년 무역협회 창립 이후 최대 숙원사업이었다. 회관 건설위원으로 선임된 나는 26개 건설회사를 심사해 5개 회사를 입찰에 참여시켰고, 풍림산업을 사업자로 선정했다.

85년 삼성동 무역센터·호텔·백화점·공항터미널·코엑스 전시장을 건설할 때도 건설위원으로 선임돼 자재 구매를 공개입찰에 부쳤다.

어느 회사의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것인지를 놓고 첨예한 대립이 벌어졌다. 입찰에는 현대와 LG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경합했다. 두 회사의 경쟁이 어찌나 심했던지 예산을 50억원 책정해놓았는데 35억원에 낙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산이 적게 들어갔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과당 경쟁의 부작용은 나중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엘리베이터의 성능이 떨어져 교체하는 등 부실의 피해를 많이 보았다.

호텔 내장 공사를 할 때에도 공교롭게 두 회사가 맞섰다. 서로 공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내가 중재에 나선 적이 있다. 극동빌딩 사무실에서 LG 구평회 회장을 만났고, 롯데호텔에서는 현대 이명박 사장을 만났다. 두 분이 협회 회장단 회의에서 다시 만났으나 고성이 오가는 등 대립이 그치지 않았다. 대기업의 경쟁의식이 너무 심하지 않나 생각했다.

대한상의 건물은 소공동에 있었으나 82년 남대문 지금 위치에 신축한 것이다.

정수창 회장이 나를 불러 상의했다.

"소공동 회관을 처분해 신축자금을 마련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경쟁입찰에 부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얼마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평당 3천만원은 받아야지요."

"3천만원이라구요?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명동이 5천만원 정도니까 소공동은 그쯤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소공동 회관의 입찰을 주도했다. 2차 입찰에서 한화그룹 삼희종금에 낙찰됐다.

"아주 잘하셨습니다.나는 예정가도 못받을 줄 알았습니다."

정수창 회장과 임원들 모두가 박수로 환호했다.

소공동 땅은 국유지 7백42평을 불하받은 것이었다. 54년 평당 1만5천환이던 땅이 82년 3천만원으로 올랐다. 이때 땅값으로 받은 돈이 2백억원은 되었다. 남대문 상의회관 신축에 큰 몫을 했다. 상의 회관은 대림산업이 시공을 맡아 84년 완공했다.

정리=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