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BJDR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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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33면

“전쟁해야 하니, 돈 좀 빌려주라.” 중세 초 유럽의 왕들은 전비 조달을 위해 상인들에게 이렇게 손을 벌리곤 했다. 그럼 상인들, 순순히 빌려줬을까. 왕이라 해서 우대금리를 적용하거나, 신용대출을 해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가산금리를 물리고, 담보도 많이 요구했다. 왕에게 돈을 제대로 돌려받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건 차입이 아니라 세금이다”라고 우기는 왕이 있는가 하면, 왕권을 뺏겨 돈 갚아줄 왕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왕은 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전리품이나 영지를 나눠주거나, 징세권을 위임해야 했다.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국가가 안정적으로 돈을 빌리게 된 것은 국채를 발행하면서다.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은 12세기부터 상인들로 구성된 차관단(신디케이트)에 징세권을 맡기고 돈을 빌렸다. 차관단은 징세권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했는데, 오늘날의 자산담보부채권(ABS)과 비슷하다. 이런 식의 자금 조달은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로 전파됐다. 15세기께 이탈리아 큰 도시들의 광장에선 신디케이트의 채권을 사고파는 시장이 섰다. 여기서 채권금리는 최종 차주인 도시국가의 사정에 따라 오르내렸다. 전쟁이 일어나면 오르고(채권값 하락), 평화가 찾아오면 떨어지는 식이다.

이처럼 국채 금리는 시장의 반응에 따라 민감하게 움직였다. 국채 금리는 전쟁의 승패도 예고한다고 할 정도였다.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가 맞붙었을 때가 좋은 예다. 양국이 각각 대량의 국채를 발행했는데, 전쟁 기간 내내 프랑스 국채의 금리가 높았다. 투자자들은 프랑스를 더 위태위태하게 봤다는 뜻이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도 그랬다. 남북은 각자의 통화로 국채를 발행해 전비를 조달했는데, 남부의 국채 금리가 늘 높았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에 세운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의 국채 금리도 전황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처음엔 프랑스 정부가 전쟁 전에 발행한 채권의 금리보다 낮았지만, 나치가 불리해지자 확 치솟았다.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나 어음도 그렇다. 발행회사의 건강 상태가 금리로 수치화돼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원리가 안 통하는 게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발행한 지방채다. 정부가 척척 사들여 주는 데다, 최악의 경우 대신 갚아주기로 돼 있다. 엄밀한 신용평가가 굳이 필요 없다. 재정상태가 나쁜 지자체의 채권은 금리가 높고, 좋은 곳의 채권은 금리가 낮은 게 정상이다. 하지만 두터운 보호막이 그런 차이를 막고 있다. 결과적으로 구조조정과 자구노력을 요구하는 시장의 압력이 발행자에게 전달되질 않는다.

최근 한 지자체의 갑작스러운 모라토리엄 선언도 그 연장선이다. 채무불이행자로서 성실한 자구노력을 하겠다는 의지가 잘 안 보인다. 속된 말로 ‘배 째라(BJR)’에 가깝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인사 청탁을 거절한 고위 관료에게 “배 째 드리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일 시장에서 ‘배 째 드리죠(BJDR)’라는 말이 나온다면 지자체의 BJR식 방만 재정은 주춤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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