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7>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36. 名畵 넣은 달력 인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달력 사진 찍을 모델이 없다"

어느날 홍보담당자 고충 호소

"속옷 사진 꼭 넣을 필요 있나"

세계 명화로 달력 만들어 히트

나는 해외 출장에서 돌아올 때면 수첩에 스케치를 잔뜩 담아오곤 했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쇼윈도에 걸려 있는 란제리, 미국 백화점 매장에 진열돼 있는 브래지어를 그려왔다.

내 스케치는 사실에 가까웠다. 비비안이 초창기에 만든 브래지어·스타킹 디자인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자화자찬이지만 그림 소질은 있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국내 화가들의 전시회를 열심히 기웃거렸다. 해외에 나가면 외국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보러 미술관 같은 데도 자주 들렀다.

김흥수(金興洙) 화백과는 그의 명작 '두 여인'이란 그림을 구입한 게 인연이 돼 친하게 지냈다.

1966년의 일로 기억된다.홍보 담당자가 찾아와 고충을 털어놨다.

"회사 달력을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속옷을 찍으려는 모델이 없어 고민입니다."

"꼭 속옷 사진을 실어야 합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수도여자대학(지금의 세종대학) 교수로 있던 장두건(張斗建) 화백을 찾아갔다.

"회사에서 달력을 만들려고 합니다. 좋은 그림이 없을까요?"

"속옷 그림 말입니까?"

"그냥 순수한 미술 작품이 어떨까 합니다만."

張화백은 좋은 생각이라며 화가들을 주선까지 해줬다. 장화백과 도상봉(都相鳳)·김인승(金仁承)·유경채(景採)·이마동(馬銅) 화백 등이 달력 그림으로 작품을 내놓았다.

여성 속옷 회사에서 순수 그림 작품으로 달력을 내놓자 반응이 좋았다. 탁상용이어서 더욱 그랬다. 여성들은 누구나 그림을 좋아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에게는 미술 교재로도 인기 만점이었다. 유명 화가의 그림을 책상 위에 놓고 개인 화집처럼 감상하는 재미가 컸던 것이다.

탁상용 달력을 달라는 전화는 빗발쳤다. 재고가 바닥나 보내주지 못할 지경이었다.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었다. 미래의 고객인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투자의 효과도 컸다.

그러나 국내 작가의 작품을 얻는 게 쉽지 않았다.그림 값도 만만치 않았다.

"이 참에 여학생들에게 세계미술 공부를 시켜보면 어떨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유럽으로 갔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여러 차례 구경했다.

스페인 피카소 기념관·네덜란드 고흐 미술관 등 세계 유명 화가의 작품이 걸린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명화를 찍은 사진첩을 잔뜩 구입했고 필름을 사오기도 했다.

이런 노력을 들여 세계 명화 시리즈로 달력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국내 작가의 그림 달력은 67년 한해만 만들고 그만뒀다.

세계명화 달력은 대히트를 기록했다. 골프를 치러 가면 캐디들이 비비안의 그림 달력을 구해달라고 야단이었다. 나는 차에 달력을 수십부씩 싣고 다니며 나눠주곤 했다.

87년부터는 저작권 문제 때문에 세계 명화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저작권 시효가 지난 화가들의 작품을 위주로 달력을 만들었다. 사망한 지 50년이 지난 화가의 그림을 찾느라 고생했다. 나중에는 저작권 시효가 70년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그런 노력마저 그만뒀다.

달력에 실을 그림을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 파리를 주무대로 활약하던 서양화가 남관 화백이 그림 선정에 많은 도움을 줬다.

세계 명화 달력은 결국 96년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동안 세계 명화는 거의 다 소개한 셈이었다.

초기에는 달력 하나에 여러 작가의 그림을 섞어 넣었고, 나중에는 한 작가의 그림으로 열두 달을 채웠다. 매년 표지를 포함해 13개 작품을 30년 동안 실었으니 3백90개의 작품을 소개했던 것이다.

명화 이후에는 속옷 입은 모델이 달력에 등장했다.

정리=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