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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에 만난 대장장이 김예섭씨>삼십 몇도가 뭐가 더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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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불 을 지배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태초에 불이 있었나니 아직 어린 인류가 미처 그 위대함을 알지못했더니라. 한참이 흘러 지혜가 얼만큼 자란 어느날 자연으로부터 문득 그 비결을 깨치면서 뭇 짐승들과의 차별을 얻는 바 있더라. 다시 얼마를 지났는지 그 족속들 가운데 눈썰미가 뛰어나고 재간이 우뚝한 자가 있어 불로부터 쇠를 가려내 이윽고 칼이며 창이며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만들어내더라. 이에 사해(四海)가 놀라 두려움에 떨며 그를 일러 대장장이란 이름으로 존경을 바치니 이로부터 문명의 진정한 열림이 있더라.

그로부터 누천년이 흐른 지금, 문명의 원형(原形)을 찾아 대장장이를 만나러 가는 날은 공교롭게도 중복날이었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던 21일 오후 찾아간 곳은 수색로변에 자리잡은 서울 남가좌1동 모래내대장간-. 바닥과 사방벽은 물론 심지어 천장까지 온통 쇠붙이들로 도배질 친 가운데 화덕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멋모르고 찾아든 방문객을 시험이라도 하듯 한껏 달아오른 제 열기를 사정없이 쏟아낸다. 가뜩이나 복더위에 꼼짝않고 있어도 등판에 땀개울이 생기는 판에 이놈의 고약한 인사치레까지 받으려니 죽을 맛(문자 쓰자면 伏上可火라고나 할까)이건만 주인장 김예섭(金禮燮·59)씨는 아랑곳없이 시뻘건 쇠불덩이를 연신 두드려댄다. 대장장이의 '위대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듯한 그의 망치질 끝에 모루 위에선 온갖 것들이 새 얼굴로 피어난다.

멀쩡했던 쇠막대가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이 되고 칼이 되는가 하면 흑인 머리카락 같던 용수철도 이내 쇠꼬챙이로 변신하고 만다. 벼린다는 표현보다 '떡주무르듯 한다'는 게 더 와 닿는다.

김씨가 이렇게 빚어내는 물건의 종류는 어림잡아 2백가지가 넘는다.가정용 식칼에서부터 공장기계부품까지 분야가 따로 없다. 칼만 해도 닭잡는 것과 소잡는 것이 다르듯 같은 종류라 해도 쓰임새까지 따져 나누면 5백가지도 더 된다. 심지어 무당들이 굿할 때 쓰는 각종 무구(巫具)와 철기시대 유물의 복제까지 주문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어낸다.

불과 쇠를 맘대로 다루는 장인(匠人)-, 미다스의 손이 따로 없다.

쇠를 다루는 직업이기에 대장장이 하면 으레 우락부락한 장골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김씨는 키 1백63㎝, 몸무게 57㎏의 작달막하고 호리호리한 체수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장장이로서 특별한 게 있다.심안(心眼)이다. 그래서인지 망치질을 하면서도 눈은 거의 딴전이다. 일단 무엇을 만들 것인지 마음에 그리고 나면 눈을 감아도 저절로 손이 따라 움직여진다. 하기야 '망치밥' 42년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두드림의 강약과 정확도가 그야말로 귀신같다.

김씨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열여덟살 때 고향인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부터. 농부의 5형제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 읍내(실은 면사무소근처)대장간앞을 지나칠 때마다 달궈진 쇠를 두드려 낫이며 호미 등을 만들어내는 게 신기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하곤 했던 터. 약골로 생긴 아들이 안쓰러웠던지 아버지의 만류는 계속되었지만 기술을 배우겠노라 무작정 대장간을 찾아가 풀무를 잡았다.

원래 풀무잡이 3년, 망치잡이 3년, 집게잡이 3년은 해야 대장간 강아지만큼의 눈치가 생긴달 정도로 고되고 어려운 게 대장간 일. 오로지 기술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품삯 한푼 받지 않으면서 3년간 '꼬마'(풀무잡이는 다른 허드렛일도 맡아 해야하는 초보자이므로 그렇게 부른다)생활 끝에 군입대 전 망치를 잡을 수 있었다.

그가 돈벌이를 위해 상경한 것은 제대 이듬해인 69년 봄. 당시만 해도 을지로 계림극장 건너편부터 한양공고에 이르는 곳에 대장간들이 촌을 이루며 성업 중이었는데 김씨는 대번에 망치잡이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음식점에서 식사 한끼에 2백원 하던 때 하루 3천~4천원씩 일당을 받아가며 3년을 보낸 뒤 드디어 기술자 반열인 '집게잡이'가 됐다. 불과 쇠에 대한 가늠이 섰다는 인정이다. 김씨는 그 때의 기쁨을 지금도 잊지못한다.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각종 공사용품 등 물건을 미처 만들지 못해 팔지 못할 정도로 일거리가 많았습니다. 기술만 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는 판에 기술자로 인정을 받았으니, 당장 갑절 가량 오른 임금도 그렇지만 기분이 어떠했겠어요."

여기서 집게잡이 6년 만에 이번엔 월 3백30달러씩(다른 기능공은 월 2백50달러) 받기로 하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뽑혀가 1년간 일할 정도로 기술을 인정받았다. 김씨가 대장장이로 독립을 한 건 81년. 그동안 푼푼이 모은 돈에 사우디서 번 목돈을 합쳐 신당동에 대장간을 차렸다. 그러나 막상 당시엔 워낙 귀한 물건인 전화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7개월 만에 팔아치우고 모래내로 옮겼다. 다시 두차례 이사 끝에 87년 지금의 자리에 정착하게 된다.

김씨는 이 해에 뜻밖의 일거리를 맡았다가 졸지에 유명(?)해지는 행운을 만났다. 한 박물관으로부터 가야시대 갑옷의 전시용 복제를 의뢰받아 20일 만에 두 벌을 만들었는데 공장안이 좁은 탓에 길거리에 걸어둔다는 게 그만 방송국 관계자의 눈에 띄어 TV 전파를 타게 된 것. 이때쯤엔 벌써 이 바닥에서 기술 좋기로 이름이 나 있던 터에 이를 계기로 '전국구'가 돼 별의별 주문이 다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한동안 물건을 만들어대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여느 대장장이 기술에다 복제능력까지 인정받은 덕분에 김씨는 요즘도 심심찮게 이와 관련한 주문을 받곤 한다.3년 전 서울대박물관에 고구려시대의 투구·칼·도끼·낫 등 10여가지를 만들어 납품한 것도 그렇고, 올 봄엔 월드컵기간 전시용 고대 일본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또 방송 사극용 각종 용품 제작의뢰도 많이 들어와 '허준'의 경우 드라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쇠붙이가 그의 손을 거쳤을 정도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김씨는 95년의 경우 월 1천여만원을 훌쩍 넘는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하도 고생을 한 탓에 4년 전부터는 건강을 생각해 하루 30여만원어치 정도만 일을 한다. 그래도 그의 작업시간은 요즘도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꼬박 열두시간이다. 이제는 꼭 돈벌이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기술을 알아주는 고객들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한 최소한의 몸가짐이다. 돈도 쓸만큼 벌어놨지만 여태껏 변변하게 놀러가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젊어선 기술을 배워 잘 살아보려고 열심히 했고, 중년엔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던 일을 놓으면 곧 쓰러질 것 같고, 나를 알아주는 손님들이 고마워 그 맛에 열심히 하는 겁니다."

김씨에겐 언제부턴가 장소를 막론하고 멋대로 굴러다니는 쇠붙이만 눈에 띄면 냉큼 집어드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강도에 따른 쓰임새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는 툭하면 이런 자신을 애국자라고 치켜세우곤 한다. 자원도 변변찮은 나라에서 버려지는 쇠붙이들을 긁어모아 어엿한 쓸모를 만들어내니 훈장받을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스팔트를 뚫는 데 사용하는 드릴촉만 해도 그래요. 개당 1만3천원씩이나 하는데 몇번 쓰고나면 무뎌져 못쓰거든요. 하지만 단돈 천원에 새 것으로 벼려주니 얼마나 자원낭비를 막는 겁니까."

이순(耳順)을 코앞에 둔 김씨는 한사코 말리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기는 했지만 대장장이가 되길 잘했다고 자부한다. 맨손으로 시작해 크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정도가 됐으니까 말이다. 김씨는 앞으로도 대장장이만큼 전망이 좋은 직업도 없다고 강조한다. 썩지 않고 유행을 타지 않는 물건들이니 한번 만들어놓으면 재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갈수록 천연기념물 대접을 받을 테니 일거리가 그만큼 늘어날 테고, 그러다보면 단가도 올라 '따따블'수입을 올릴 수 있을 거란 얘기다. 지난해부터 특수강으로 만든 '모래내'표 장도리를 출시 중인 김씨는 장시간 인터뷰에 짜증이 나는 듯 손만큼이나 투박하게 한마디 내지른다.

"우리네야 일할 때 몰골이 좀 꾀죄죄해서 그렇지, 아-, 로켓·인공위성을 만드는 사람이 별거여. 쇠를 만지작거리기는 지나 내나 한가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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