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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을 역사의 거리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5면

세종로는

우리나라의

안방 아랫목

차 없는 거리 조성

조선왕조실록

바닥에 새기자

퇴계·율곡 등

동상도 만들어

창고 안의 역사

밖으로 불러내자

어느 책 제목처럼 세계가 만일 인구 1백명의 마을이라면 우리나라는 우리 집, 서울은 안방이 될 것이다.

지난달 우리집 안마당에서 동네 족구대회가 열렸다.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몰려왔다. 온 식구들은 족구에 빠져들었다. 생각지도 않게 우리 선수들이 이웃집 선수들을 모조리 제압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 친척 꼬마들이 몰려들었다. 족구장이 보이지 않는 안방·건넌방에서는 TV를 켜놓고 응원을 했다. 나중에는 창고, 화장실에까지 빼곡이 들어섰다. 장롱 속에 모셔두었던 원앙금침 이불단을 뜯어내 머리에 두르고 응원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른들은 의아해 했다. 못된 촌장을 몰아내자고 씩씩거릴 때 빼고 자기들은 이렇게 모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응원 소리가 하도 커서 대들보가 무너지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꾸지람할 구석이 없나하고 얼굴을 구겨가며 챙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합 뒤에 족구장의 휴지를 모두 줍고 비질까지 말끔히 해놓고 가는 아이들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집 이불단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족구대회가 끝나자 어른들은 우리 집안을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잔치를 제대로 벌일 곳을 만들자고도 했다. 그러나 안방 아랫목에는 어른들의 신발 자국이 가득했다.

60억 명이 사는 세계로 돌아가자. 우리의 안방 아랫목, 우리가 가꾸어야 할 도시 공간, 시청앞이나 대학로보다 더 중요한 공간이 세종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동차를 신고 우리의 아랫목을 돌아다니고 있다. 자동차 없는 시민의 공간이 되어야 할 바로 그곳이 세종로다.

그리하여 끝내 이곳은 자동차가 지나가는 길 세종로가 아니고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마당 광화문통이 되어야 한다.

반대는 단 하나, 자동차다. 하루에 몇십만대의 자동차가 지나가는지 아느냐고, 차선 하나도 내줄 수 없으니 그리 알라고 버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자동차가 너무 많다. 교통사고율은 영원한 우승 후보다. 대기오염도는 4강을 넘어 우승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면서도 버스는 승객 감소로 적자운행을 해야 하는 도시에서 반대의 근거는 희박하다.

도심은 자동차를 몰고 다니기에 더 어렵고 불편한 곳이 되어야 한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기에 더 쉽고 자연스런 곳이 되어야 한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사랑스런 젊은 그대, 태양 같은 젊은 그대의 얼굴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어야 도심은 아름다워진다.

남북 방향으로 가는 자동차는 교보생명 사옥 뒷길과 정부중앙청사 뒷길을 확장해 우회시키자. 동서 방향 자동차는 광화문 앞으로 지나가는 지하차도를 만들어 해결하자. 이미 그 아래 깊이 지하철 3호선이 지나가고 있으니 안될 일도 없다. 필요한 것은 계산이 아니고 결단이다.

그렇게 얻은 이 거대한 공간은 어떻게 할까.

조선사회가 남긴 가장 중요한 문화적 유산은 『조선왕조실록』과 한글일 것이다. 이 둘은 최근에 결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번안된 것이다. 이것을 도시공간과 결합시키자.

광화문통, 즉 육조거리는 조선사회가 이 땅에 남긴 가장 중요한 도시적 유산이다. 한글판 『조선왕조실록』을 돌판에 새겨 광화문통 바닥에 가득 깔아놓자.

제왕의 학문이었던 역사는 궁궐과 서고의 자물통을 열고 시민의 공간으로 나왔다. 이 시대는 임금님이 아닌 시민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역사책에는 활자뿐 아니라 그림도 있고 사진도 있다. 실록에 등장하는 사람과 물건 만큼 그 위치에 동상도 만들고 모형도 만들어 놓자. 이제 광화문통에 모인 붉은 응원의 함성 속에서는 퇴계 할아버지도 율곡 할아버지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세종 25년에 가서 친구와 만날 약속을 할 수도 있게 된다.

자동차가 없어지면 주차장도 필요 없다. 세종로변 관공서들의 주차장에 상가를 짓자. 국수도 사먹고 아이스크림도 사먹자. 세종로공원 지하주차장은 잘 고치면 최고의 서고가 될 수 있다. 규장각 창고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옮겨오자.

광화문통에는 역사가 가득해진다.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쓴다. 더 이상 4·19세대와 같은 경제적 피해의식도, 386세대와 같은 역사적 채무의식도 없는 새로운 세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임을 온몸으로 깨달은 단군 이래 첫 세대가 그 역사를 쓴다.시간이 흘러 가을이 가고 또 겨울이 왔을 때 그들이 반추할 아름다운 광화문통, 그 눈 덮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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