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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공기계회사 '木友'사장 민진홍 씨:선진제품 따돌린 '품질 제일'옹고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낡 은 쏘나타 한 대와 통역 한 사람. 중국 칭다오(靑島)의 목공기계 제작공장 목우(木友)의 민진홍(閔鎭弘·46)사장이 1997년 겨울,'중국 대장정(大長征)'에 동반한 친구들이다. 중국 동북단 북국(北國)의 도시 하얼빈(哈爾濱)에서 양쯔(揚子)강 남녘 미인(美人)의 도시 항저우(杭州)까지 이어진 8천㎞의 먼길이었다.

왜 나섰을까. 살기 위해서였다.'판로를 뚫지 못하면 죽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휘달린 여정이었다.

당시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껏 고조된 때였다. 다락 같이 오른 달러값은 목우의 한국 수출길을 틀어막았다. 이미 열었던 신용장조차 발주업체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큰일 났구나'.

閔사장은 당황했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중국 시장 개척만이 유일한 생로(生路)였다. 전략도 하나였다.'품질'이었다. 물건만 좋으면 반드시 살 사람은 있다고 閔사장은 믿었다.

문제는 당장 필요한 운영자금이었다.무작정 칭다오시 대외무역촉진위원회(CCPIT)의 차이전산(蔡振山)주석을 찾아갔다. 蔡주석은 閔사장이 94년 30만달러를 들고 중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투자 조언을 해준 '옛친구(朋友)'였다. 거두절미하고 "돈 좀 빌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금융 한파 속에서 무담보 대출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나 蔡주석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등을 돌렸던 은행들이 다시 돌아앉기 시작했다. 대출은 사흘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천운이었다.

8천㎞의 대장정은 이렇게 공장 숨통을 틔워놓은 뒤에야 시작됐다. 통역 하나만 달랑 대동한 채 쏘나타에 몸을 실은 閔사장은 '판로 찾기는 분명 어렵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되뇌었다.

"당시 중국 내 목공기계 시장은 대만 제품들이 석권하고 있었어요. 최고 품질로 치는 일본과 독일 기계들은 값이 비싼 탓에 시장 점유율은 미미했지요. 결국 기술적으로 일본·독일의 제품에 밀리지 않으면서 가격을 낮추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전 제 기술로 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문제는 판매망 확보였지요."

閔사장이 대장정에 나선 이유다.

"직접 수요자를 만났습니다. 중간 상인은 배제했어요. 어떤 제품을, 어떤 가격으로 요구하는지를 '엔드 유저(End-User·최종 소비자)'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꼬박 한 달 남짓 1백여명의 고객들과 부딪혔습니다."

한달 이상의 겨울 여정은 신산(辛酸)으로 가득했다. 閔사장의 길 양식은 한달 내내 '칭자오투더우쓰(靑椒土豆絲·풋고추·감자 볶음)'였다. 가장 싸고, 그나마 배부른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칭다오를 출발해 하얼빈을 돌아 베이징(北京)까지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호주머니를 뒤져도 바람만 가득했다. 뤼서(舍·여관)에 들 여유가 없었다. 차 안에서 새우잠을 잤다. 한밤중에 공안(경찰)이 차창을 두드렸다.

공안은 "왜 차 안에서 자느냐"고 따져물었다.범죄자를 보는 듯한 눈초리였다."돈이 없어 차에서 잔다"고 대꾸하자 대뜸 "돈이 없는데 중국에는 무엇하러 왔느냐"는 힐난이 되돌아왔다. 순간 閔사장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 겨울 대장정은 그러나 소중한 자산으로 閔사장에게 돌아왔다. 이곳 저곳에서 기계구매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閔사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閔사장은 우선 매년 베이징에서 열리는 '전국 목공기계 전시대회'에 주목했다.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대장정으로 닦아 놓은 판로에 불을 댕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때부터 閔사장은 '작품' 만들기에 들어갔다. 한국에 남아 있는 마지막 재산인 전세보증금 2천만원이 작품 제작의 밑천으로 들어갔다.

"전시장에 모두 고가·고품질의 제품만 내 놓았습니다. 품질 외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전시된 제품이 모두 팔려 나간 것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서 한달 반 정도 걸려야 댈 수 있는 주문량을 확보했지요."

그 때 중국 관영 CC-TV의 기자가 찾아와 '이젠 중국에서도 이런 고품질의 기계가 생산된다'는 취지의 특집 기사를 꾸미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왔다.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CC-TV의 특별기획은 목우를 일약 일류 브랜드로 끌어올렸다.

閔사장의 '품질 제일주의'가 낳은 아이디어가 바로 '애프터 서비스'였다. 다른 업체들엔 아예 그런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閔사장은 98년 전국 6개 도시에 대리점을 열었다.

"막상 대리점을 열었지만 찾는 고객은 거의 없었어요. 그만큼 기계가 튼튼하다는 증거지요."

애프터 서비스의 상황을 설명하는 閔사장의 얼굴엔 은은한 자부심이 깔렸다.

閔사장 회사에서 만난 한 중국인 목공기계 제작자는 "'가장 싼 제품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서, 전통 목공예 기계는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선진 목공기계는 칭다오의 목우에서 찾아라'는 말이 중국 내 목공기계업계에서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閔사장의 품질주의 경영이 결국 결실을 보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閔사장의 저력은 품질만을 추구하는 옹고집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만의 독특한 친화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 실 그는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閔사장이 겨울 대장정에서 만났던 고객들 대다수가 이젠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됐다는 사실은 그의 친화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목우가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긴급 대출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친화력 덕분인지 모른다.

실제 칭다오의 시 정부·향(鄕)정부 관계자들은 閔사장을 '한국 풍모를 지닌 중국인(帶韓國風貌的中國人)'이라고 부른다. 閔사장을 아예 중국 사람으로 친다는 얘기다.

"閔사장이 부르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올 중국 친구들이 아마 한 보따리는 될 것"이라는 쾅하이잉(匡海英) CCPIT 부주석의 말이 미상불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閔사장은 자기에게 돈을 벌게 해 준 이들 중국 친구에게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굳힌 상태다.

"중국에서 번 돈은 중국에 돌려주려 합니다. 방법을 찾고 있지요. 한가지는 결정했습니다. 회사 경영권을 궁극적으로는 중국인에게 넘겨주겠다는 겁니다."

閔사장은 이미 칭다오시의 각 일간지에 전문 경영인 모집 광고를 냈다. 閔사장이 중국 생활을 접으려는 걸까. 그건 아니다. 그의 시선은 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산기지에 해당하는 중국 공장은 중국인에게 넘기고, 저는 아시아권을 무대로 하는 목공기계 물류단지를 한국에 꾸리고 싶습니다."

閔사장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었다.

한국에서 공업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잡은 한 기계제작공장에서 閔사장에게 늘 따라 다녔던 호칭이 '건방진 놈'이었다. 수공으로만 해왔던 목공기계 제작에 컴퓨터를 접목하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품질로만 집요하게 달려가는 그의 집념은 곧 인정을 받았고,32세에 이 업체의 사장으로 발탁되는 뒷심이 됐다.

그는 목공기계를 만들 때 돈을 떠올리지 않는다고 한다.'작품'을 생각한다고 한다.

"인생의 가치도 금전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나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을 추구한다는 것,그게 제겐 삶의 기쁨이자 보람이지요."

'작품'을 추구하는 閔사장의 꿈이 기회와 도전의 땅 중국에서 어떻게 영글어갈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칭다오=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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