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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떨어진 별 - 해외] 역사속으로 떠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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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 정계

냉전 종식 이끌어낸 레이건 전 대통령

세계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정치 지도자들이 잇따라 유명을 달리했다.

11월엔 40여년간 가장 주목받는 아랍 지도자로 꼽혀온 야세르 아라파트(7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프랑스 페르시 군병원에서 숨졌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을 거쳐 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초대 수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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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93년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해 중동 평화 정착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고, 이 공로로 94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 3년간은 자치정부 청사에 갇혀 지내는 등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지난 10년간 알츠하이머병을 앓다 6월에 숨을 거둔 로널드 레이건(93)전 미국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함께 냉전 종식을 이끌어낸 역사적 인물로 기억된다. 81년부터 8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감세(減稅)와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한 경제회생책인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해 불황에 빠진 미국 경제를 소생시킨 것도 공적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할리우드 B급 배우에서 출발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의 영화 같은 인생 역정 자체가 미 국민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3월 말 이스라엘의 표적 공습을 받고 폭사한 팔레스타인의 최대 무장조직 하마스의 창설자 셰이크 아메드 야신(66)은 아라파트와 더불어 팔레스타인의 양대 지도자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팔.다리가 마비됐으나 휠체어에 의지한 채로 이스라엘에 맞서 강경한 투쟁을 이끌었다.

7월 초 타계한 오스트리아의 토마스 클레스틸(71)대통령은 전차회사 역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외교관으로 명성을 날리다 대통령에 당선됐고, 오스트리아의 유럽연합(EU) 가입을 성사시켰다. 같은 달 숨진 스즈키 젠코(鈴木善幸.93)전 일본 총리는 81년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미.일 관계를 동맹으로 처음 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 연예계

'대부'의 개성파 배우 말런 브랜도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스타들도 아쉬움 속에 팬들의 가슴에 묻혀야 했다.

영화 '수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52)는 95년 마술(馬術)경기 도중 낙마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뒤 눈물겨운 재활 의지로 전 세계인을 울리다 결국 10월에 숨을 거뒀다.

그는 황우석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강력히 지지하며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안겨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지옥의 묵시록'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선보인 전설적인 배우 말런 브랜도(80) 역시 7월 초 영원히 은막을 떠났다.

그가 73년 인디언에 대한 할리우드의 부당한 취급에 항의하며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밖에 영화'킹콩'의 여주인공 페이 레이(96)가 8월에,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스릴러물 '사이코'에 출연했던 여배우 재닛 리(77)가 10월에,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 역을 맡았던 영국 출신의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82)가 3월에 사망했다.

'십계''앵무새 죽이기''대탈주'등 영화의 주제음악을 작곡한 엘머 번스타인(82)이 8월에, '혹성탈출''스타트렉''람보'등의 영화음악 작곡자 제리 골드스미스(75)는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미국 흑인 음악의 대부'라 할 레이 찰스(74)가 6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세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일곱살 때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열다섯살 때 사고로 부모마저 잃었으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해 13차례나 그래미상을 받는 위업을 이룩했다.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아이 캔트 스탑 러빙 유'등 숱한 명곡을 남겼다.

'글로리아'로 80년대를 풍미했던 팝가수 로라 브래니건(47)도 8월 말 숨졌다. '글로리아'는 36주간 팝 차트 1위에 올랐다.

*** 경제계·기타

'기네스북' 만든 노리스 매쿼터

세계적 화장품 회사 '에스테 로더'의 창업자인 에스테 로더(97)가 4월 말 별세했다. 98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의 천재 경영자 20명'중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됐던 그는 "나는 하루도 내 물건을 팔지 않은 날이 없다"며 타고난 장사꾼임을 자처해 왔다. 그가 46년 창업한 에스테 로더는 세계 130개국에서 연간 51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세계 최대의 네트워크 마케팅 기업인 암웨이의 공동창업자 제이 밴 앤델(80)도 12월에 숨졌다. 그는 59년 리치 디보스와 함께 지하실에서 암웨이를 설립해 현재 56개국에 현지 법인을 두고 연매출 62억달러를 올리는 거대 기업으로 키워냈다.

'기네스북'의 공동 창시자인 노리스 매쿼터(78)는 4월에 숨졌다. 매쿼터는 54년 쌍둥이 형제 로스와 함께 인간과 자연의 경이적인 기록을 담는'기네스북'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100개국에서 1억권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영국 왕실의 최고령자이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숙모인 앨리스(102) 공주가 10월 말에, '국민의 여왕'으로 불렸던 네덜란드의 율리아나(94) 여왕이 3월 말에 세상을 떠났다. 대만 장징궈(蔣經國)전 총통의 부인 장팡량(蔣方良.본명 파이나.88) 여사는 12월에 별세했다. 그는 러시아의 여공 출신으로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올라 '대만의 신데렐라'로 불렸다.

신예리 기자

*** 학계·문화계

해체주의 창시로 '철학 스타'된 자크 데리다

학계와 문화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러 거장도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해체주의'를 창시해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로 꼽힌 자크 데리다(74)는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10월 타계했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에 이어져온 이성적 전통을 비판한 그는 역사.정치 등 이성이 만든 개념에서 세상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특히 언어에 초점을 맞춰 텍스트에는 불변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다극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나치게 난해한 철학이라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철학 스타' 대접을 받았다. '그라마톨로지''마르크스의 유령들' 등 숱한 저서를 남겼다.

7월 말 결장암으로 사망한 프랜시스 크릭(88)은 53년 제임스 왓슨과 함께 디옥시리보핵산(DNA)이 이중 나선 형태로 꼬여 있음을 발견해 62년 노벨상을 받았다.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으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프랑수아즈 사강(69) 역시 심장과 폐질환으로 수년간 고생하다 9월 말 별세했다. '어떤 미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 40편 이상의 소설과 희곡을 남긴 그는 과속과 담배.도박을 즐겼는가 하면, 코카인 복용 혐의로 기소된 뒤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붙은 '교양'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독일 작가 디트리히 슈바니츠(64)는 파킨슨병을 앓다 12월 말 숨졌다. 78년 함부르크대 교수로 부임한 뒤 20년간 영문학을 가르쳤고, '캠퍼스' '남자들'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공산혁명 등 20세기 주요 사건을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95), 대공황과 한국전쟁 사진으로 잘 알려진 잡지 '라이프'의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97)는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음악계에선 마리아 칼라스의 라이벌로 꼽히던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82)가 12월에, 독일 출신의 명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74)가 7월 초에 사망했다. 미국 현대 무용계의 전설적 무용수이자 뛰어난 안무가인 벨라 레비츠키(88) 역시 7월에 숨졌다.

[바로잡습니다] 12월 30일자 15면 '2004년 떨어진 별' 기사 중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차이와 반복'이란 저서를 남겼다는 부분이 사실과 다르기에 바로잡습니다. '차이와 반복'은 데리다가 아니라 질 들뢰즈의 저서입니다. 지난 10월 데리다가 타계했을 당시 실린 부고 기사의 저서 목록을 별도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했다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게 됐습니다. 지적해 주신 독자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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