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무술교본 펼치니 곳곳에 게임 무기 아이디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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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세계적 히트 상품인 미국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나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는 모두 귀신 얘기다. 기기묘묘한 귀신들이 수천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이런 스타 귀신이 없다. 도깨비·구미호·처녀귀신·달걀귀신 등등 귀신은 많지만 별다른 특징 없이 그저 천편일률의 옛날 얘기처럼 밋밋하다.

그렇다고 우리 전통 귀신들이 본디 그렇게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귀신과 그들에 관한 얘기는 민화(民畵)와 전통공예품의 문양, 궁중 공식문서인 의궤(儀軌)와 각종 고문서의 삽화 등 여러 형태의 기록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져 왔을 뿐이다.

이같이 우리 전통문화에 숨어 있는 얘깃거리나 구경거리를 되살려 디지털 자료로 재활용하려는 작업이 '문화원형 디지털 콘텐츠 사업'이다. 우리 귀신과 우리 얘기, 우리 색깔과 디자인으로 만화·애니메이션·영화·게임을 만들어 돈도 벌고 문화도 풍성하게 가꾸자는 취지다.

이같은 취지에서 정부는 지난해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www.mct.go.kr)이란 별도 기구까지 만들었고, 진흥원은 모두 1백50억원의 예산을 들여 콘텐츠 사업자 지원에 나섰다. 진흥원은 지원대상 사업을 공모, 모두 4백28개 업체로부터 콘텐츠개발 프로젝트를 제안받아 그중 35개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다. 대략 3억원씩 준다.

선정된 프로젝트를 보면 우리 전통문화콘텐츠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 검안(檢案)기록 콘텐츠 개발' 프로젝트는 소설가 김영하씨가 들으면 귀가 번쩍 뜨일 내용이다. '검안'이란 살인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서울대 규장각에는 모두 5백31 가지의 조선시대 검안 기록이 남아 있다.

그동안 사장돼온 이 검안 기록을 콘텐츠로 개발하자는 아이디어를 역사학자 김호 박사(규장각 연구원)가 냈다. 김박사는 『증수무원록』 등 법의학 관련 지침서까지 참고해 조선시대 살인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을 디지털화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속에는 살인으로 비화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극적 인간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검시(檢屍)기술과 고문·취조방식에 이르기까지 형사 기록들도 생생하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1996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소설을 내놓아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던 젊은 작가. 소설의 주인공이 '자살 보조원'이란 특이한 직업이라 화제가 됐는데 소설 속에서 다양한 자살 방법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이런 특이한 내용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군복무 시절 변시체를 검안하는 업무를 맡았던 덕분이다. 그에게 조선시대 수백년간의 검안 기록은 무궁무진한 창작의 원천이 될 것이다.

역사학도인 김박사의 전문지식과 소설가 김씨의 상상력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문화콘텐츠(소설)는 다시 영화나 드라마로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 김씨의 소설은 영상화에 적합해 이미 드라마로 많이 옮겨진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드라마 제작자는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귀중한 소재로 만든 사실적인 스토리를 확보한 상황에서 보다 나은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들이 눈독들일 내용은 더 많다. '한국 전통무기 및 몬스터 개발'은 조선시대 무술 교본인 『무예도보통지』 등에 나오는 전통무기, 그리고 각종 장식이나 전통문양에 새겨진 한국형 몬스터를 3D 동영상으로 되살리는 프로젝트다.

'한민족 전투원형 개발'이나 '조선시대 진법(陣法·군사배치전략) 및 전투전술의 시각적 재현','해전(海戰)원형 복원' 등의 프로젝트도 모두 전쟁을 소재로 하는 게임용 소프트웨어에 당장 활용이 가능한 콘텐츠들이다.

'조선시대 국왕 경호와 도성 방어체제 콘텐츠 개발' 프로젝트는 전쟁·전투 관련 프로젝트 가운데서도 매우 특수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경호 군사들만의 특이한 복장이나 무기만 아니라 임금 시해 같은 사건과 관련 일화까지 함께 찾아내 공개한다고 한다.

단청 분야 인간문화재인 만봉 스님이 보유하고 있는 8천여 문양을 분류하고 이미지로 개발하는 '단청문양 디지털화 방안'이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처음으로 번역해 1백50년 전 한반도의 인문지형을 3D로 재현하는 프로젝트, 한석봉과 같은 명필의 글씨를 이용해 글자꼴을 개발하는 '전통 디지털 폰트 개발' 등의 사업도 모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것들이다.

콘텐츠진흥원 홍정의(35)씨는 "조상들이 남긴 방대한 기록이 21세기 들어 비로소 재조명되고 있다고 본다"면서 "5년 계획으로 추진 중인 사업인데, 일단 이번에 선정된 프로젝트의 결과는 내년 상반기 중 '한국 콘텐츠 리소스 센터'를 만들어 무료로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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