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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8>제102화 고쟁이를란제리로:17. 마카오 신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950년대 홍콩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사람들을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다. 또 이들이 하는 무역을 '마카오 무역'이라고 했다.

마카오와 홍콩은 엄연히 다른 도시인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당시에는 별 생각없이 그렇게 사용했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역상들의 무대가 홍콩이었는데도 '마카오'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47년 3월 17일 인천항에 들어온 무역선 '페리오드호'가 마카오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생고무와 양복지, 그리고 신문용지 2천t을 싣고 마카오를 출발한 배가 인천항에 도착한 게 세간에 화제를 낳으면서 마카오 무역·마카오 신사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 같다.

아무튼 홍콩을 오가는 마카오 신사는 외모면에서 여덟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최소한 이 조건들을 갖춰야 마카오 신사 축에 들었다고 봐야 한다.

첫째, 영국제 양복지로 양복을 맞춰 입어야 한다.

둘째, 영국제 와이셔츠를 속에 받쳐 입어야 한다.

셋째, 이탈리아제 발리 구두를 신어야 한다.

넷째, 스위스제 롤렉스 시계를 차야 한다.

다섯째, 이탈리아제 악어가죽 벨트를 매야 한다.

여섯째, 프랑스제 크리스티앙 디오르 또는 루이뷔통 손가방을 들어야 한다.

일곱째, 샘소나이트 여행용 트렁크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여덟째, 필그램 파나마 모자를 써야 한다.

마카오 신사들의 몸치장은 이처럼 요란했다.요즘에도 명품으로 통하는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들을 당시에 이미 입고 걸치고 썼던 것이다. 사치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르지만 해외에 나가 바이어들을 만나 협상을 성공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당시에 홍콩을 무대로 활약하는 우리나라 무역상들은 줄잡아 30여명에 달했다. 나 역시 여덟 가지 기준에 미달되지 않는 편에 속했다.

홍콩은 섬이고, 마카오는 중국 대륙으로 통하는 항구 도시다. 마카오는 50년대에도 도박의 도시로 유명했다. 카지노에 관심이 없던 나는 홍콩을 드나들면서 딱 한번 마카오에 가본 적이 있다.

마카오에 들르는 한국 무역상들은 세계 갑부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피라미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무역상들도 주머니에 돈을 넉넉하게 갖고 있기는 했지만,마카오의 카지노에 들어가 도박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류 호텔에서 먹고 자며 카지노에 나가 도박을 즐기고 돈을 물쓰듯 하는 도박꾼들,그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한 '마카오 신사'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무역상들은 돈을 벌러 다녔지만 그들은 돈을 쓰러 다녔다. 따라서 당시 우리나라 무역상들은 마카오 신사라기 보다는 '홍콩 신사'라고 하는 게 마땅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무역상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 경제 규모가 작았던 시절이지만 해외를 오가며 무역으로 번 돈은 덩치가 컸다. 무역상들의 씀씀이도 컸다. 그렇다고 모든 무역상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돈 쓰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54년으로 기억한다. 동광기업(東光企業) 조봉구(趙奉九) 회장과 홍콩을 찾아 경도반점(京都飯店)이라는 호텔에 투숙한 적이 있다. 삼류에 해당하는 싸구려 호텔이었다.

조회장은 남대문 앞에 그랜드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갑부였다. 우리는 하루 저녁 홍콩 거리를 산보했다. 그러다가 조회장이 '퀸스로드' 오락극장 안에 있는 빵가게를 보면서 뜻밖의 제의를 했다.

"호텔에 가서 비싼 음식 먹지 말고 저기서 빵과 오렌지 주스를 사다가 먹읍시다."

우리는 호텔에서 생활 하면서도 빵으로 식사를 때우는 날이 많았다. 호텔 식당 냉장고에 맡겨놓았던 김치와 함께 방에서 먹는 빵은 훌륭한 식사였다.

"제가 노랭이 1단이라면 조회장님은 9단입니다."

내 농담에 그는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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