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메이드 인 EU'만 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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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헝가리 부다페스트 외곽 두나바르샤니에 있는 프랑스계 대형 할인매장 오션에는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수입된 생필품이 꽉 차있다. 헝가리는 생필품의 70%를 수입하고 있지만,이들 중 대부분은 중국산 저가 생필품이 아닌 유럽산이다. 헝가리가 EU의 준회원국이어서 유럽산 제품에는 관세를 물리지 않아 역외국 상품에 비해 가격경쟁력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주요 백화점·할인점에도 온통 이웃나라 생필품이 넘친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이를 수입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르투갈 경제장관 출신 아우구스토 마테우스(리스본기술대학)교수는 "EU는 하나이기 때문에 생산국이 어디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메이드 인 EU'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화폐를 쓰고, 관세도 무역장벽도 없는 '하나의 시장 EU'가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세계무역기구(WTO) 통계에 따르면 2000년 EU 무역의 67.8%가 역내무역이다. 한국 제품의 EU 수입시장 점유율이 0.99%에 불과할 정도로 진입하기 어려운 EU 시장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사고 팔고 다 하는 것이다.

EU 집행위의 퍼 하우가르드 대변인은 그러나 "EU는 개방도가 높은 시장이며,삼성·LG 등의 한국 브랜드도 많이 들어왔다"며 역외국에 대한 진입장벽을 부인했다.

물론 EU시장엔 한국·미국·일본 등 역외국 브랜드가 상당수 진출해 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이들도 EU 현지공장에서 생산해 파는 '메이드 인 EU'가 대부분이다. 역외국 제품에 물리는 평균 7~10%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 부품 등을 60% 이상 EU국 제품으로 쓰는 곳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포장만 외국 브랜드이지 내용은 완전히 유럽 제품이라는 것이다.

삼성전기 헝가리법인 이세운 법인장은 "일부 부품을 한국·중국에선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여기는 구하기 힘들어 애먹을 때도 많다"고 말했다.

역내 국가들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다.1999년 EU국들의 해외 직접투자(5천6백억유로) 중 64%인 3천6백억유로가 역내지역에 투자됐다. 또 포르투갈·그리스 등 경제력이 떨어지는 국가의 경우 생활수준을 유럽 평균수준으로 끌어올리라며 선진 회원국들이 돈을 거둬 나라별로 연간 30억~50억유로(3조~5조원)정도의 지원금을 준다. 이를 통해 유럽 후진국들은 인프라를 정비하고, 일자리를 늘리는 등 생활수준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동안 EU 단일시장의 경제적 효과는 예상보다 낮은 수준을 맴돌았다. 88년 역내 단일시장이 완성되면 초기 6년간 국민총생산(GDP)의 4.5%를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 1%대에 머물렀고,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U는 중·동부 유럽 10여개국도 회원국으로 끌어안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등 확대작업을 벌이고 있다.이에 대해 이 지역 각국 국민들의 지지도도 나라별로 51~65%로 높게 나왔다.

무역협회 제현정 연구위원은 "57년부터 진행된 EU 통합의 역사로 인해 통합에 익숙한 국민정서와 좁은 시장을 넓히려는 시장확대의 욕구,좁은 유럽대륙에서 수세기 동안 전쟁을 벌였던 역사를 청산하고 안정과 평화를 얻는다는 정치적 목적이 얽히면서 자연스럽게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훔볼트대의 마이클 부르다 교수는 "EU가 동유럽까지 확대되면 시장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선진·후진지역이 공존하며 기술개발부터 생산기지까지 모두 EU 안에서 해결되는 등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EU의 전략을 보면 단순히 유럽국가들끼리 모여 자급자족하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EU는 남아프리카·남미자유시장·칠레·멕시코와 과거 EU국의 식민지역인 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ACP)지역 등 비 EU지역과도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며 관세나 무역장벽 없는 시장을 계속 확대하고 있는 중이다.

부다페스트·빈·베를린·브뤼셀·리스본=양선희 기자

세계 시장에서 특정 국가들끼리만 담장을 허물고 특혜 교역을 하는 블록화가 강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해당 국가들의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취지지만, 역외국엔 거대한 무역장벽으로 다가온다. 대표적인 블록 경제권인 유럽연합(EU)과 중남미 시장을 본사 취재팀과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 FTA(자유무역협정)팀이 동행 취재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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