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 머물던'行宮'터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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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경기도 파주에서 고려시대 행궁(行宮·임금이 지방나들이 때 머물던 숙소)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소장 박경식)는 지난 2년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4리 우암산 기슭에 있는 혜음원(惠陰院)터를 발굴한 결과 행궁이 있었던 곳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소가 최근 펴낸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이 곳엔 사찰인 혜음사, 관립 숙박시설인 혜음원과 함께 행궁이 있었으며 행궁은 몽고 침입 당시 화재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과 혜음원의 건립=혜음원 터는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개성)과 남경(서울)을 오가는 주요 길목으로 행인들이 하룻밤을 묵어가야 하는 지점인데, 호랑이 등 맹수와 산적이 자주 나타나 피해가 크자 임금이 특별히 지시해 숙박시설을 지었다. 혜음원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1144년에 남긴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라는 글이 유일하다.

이에 따르면 1122년 예종의 부탁을 받은 묘향산 스님들이 이곳에 절(혜음사)을 짓고 여행객들을 위해 혜음원을 운영했으며, 얼마뒤 임금이 남경을 찾을 경우 숙박할 수 있는 행궁을 추가로 건립했다고 한다.

◇행궁 터 발굴=기록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혜음사·혜음원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는데, 1999년 파주시의 문화유적 지표조사 당시 우암산 기슭에서 고려시대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됨으로써 혜음원 터일 가능성이 처음 제기됐다. 이에 따라 파주시는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에 본격적인 발굴을 요청했고, 그 결과 김부식이 남긴 글과 일치하는 행궁 터가 드러난 것이다.

발굴팀이 행궁임을 확신하는 근거는 건물의 배치와 발굴된 유물의 성격. 행궁의 정전(正殿·임금이 머물던 건물)으로 추정되는 곳은 발굴 대상 4천평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큰 건물(가로 20m, 세로 6m 규모)이다.

<그림 참조>

가장 높은 지대에 만들어졌으며, 담장과 축대로 사방이 막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이 건물 주변의 다른 건물들이 모두 좌우 대칭으로 늘어 서 왕궁 부속건물의 배치 관례를 따르고 있다.

이 곳에서 발견된 치미(기와지붕 끝 장식)나 기와 조각 등이 모두 최고급품이고, 바닥에 깐 돌도 모두 잘 다듬어져 있어 보통 건물은 아니다. 출토된 청자 조각도 고급 유약과 흙을 사용한 상품들이다.

◇혜음원 터=혜음원 터는 행궁의 아래쪽. 석축으로 행궁과 구분된 아래쪽 건물은 칸막이로 작게 나눠진 방들이 길게 이어진 구조인데, 가운데 마당을 비워두고 건물이 둘러선 'ㅁ'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하나 걸러 한 방씩 난방용 화덕이 설치됐던 흔적이 있으며, 오른쪽 뒷마당에는 세탁과 목욕을 위한 배수로와 물 저장시설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현재의 명칭과 달리 '혜음원(惠蔭院)''혜음사(惠蔭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그릇이 많이 나와 부엌이나 식당도 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팀은 현재 묏자리와 논으로 이용되는 인근 지역에 대한 발굴을 하지 못해 혜음사 터는 확인하지 못했다.

◇행궁의 소실=행궁 터 흙을 들어내자 일정하게 20㎝ 두께의 검은 흙더미가 나왔다. 화재가 있었다는 증거다. 치미나 막새와 같이 처마의 끝머리에 위치한 기와들이 정확하게 처마선과 일치하는 곳에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 불에 탄 건물이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부식 이후 기록이 없고, 출토된 청자 등이 모두 12, 13세기초에 집중된 것으로 미뤄 여섯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13세기 중반) 당시 불탄 것으로 보인다.

박경식 소장은 "고려시대 행궁과 원(院)이 정확하게 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절 역시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번에 발굴을 못했다. 사적으로 지적하고 추가 발굴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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