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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해부 길거리응원>"우린 하나" 억눌렸던 공동체의식 분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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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5년 전 인터넷 축구동호회 젊은이들로 시작된 길거리 응원은 이번 월드컵을 맞아 국민적 축제의 장이 됐다. 초창기에는 불과 수십, 수백명에 불과하던 응원단은 한·미전이 열린 지난 10일 전국적으로 70만명(경찰 추산)에 달했다.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은 오후 2시30분 개방됐지만 시민들은 오전 8시부터 몰려들었다. 광장이 열리자 붉은 티셔츠를 와이셔츠 안에 받쳐 입고 있던 직장인들은 겉옷을 벗고 뛰어들기도 했다.

경기 시작 몇시간 전부터 시민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막상 경기가 진행될 때는 이미 그들의 목이 쉰 상태였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으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응원 구호는 더욱 커져만 갔다.

대형 전광판이 경기장인 대구구장 응원단의 모습을 중계할 때면 시청 앞의 길거리 응원단은 답례라도 하듯 일제히 두팔을 올렸다. 전광판을 매개로 그들은 한 공간에 있었다.

누군가가 두팔을 힘차게 벌리고 "대~한민국"을 외치면 모두가 조건반사적으로 두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 모습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하나의 생물체였다.

그런 길거리 응원단을 보면서 떠오르는 단어는 환희, 분출, 광기(狂氣),군중의 힘, 집단 최면, 축제같은 것이었다.

◇전문가 진단=심리학자·사회학자들은 길거리 응원 열기를 우리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를 사회발전의 국민적 에너지로 발전시킬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박길성(朴吉聲·사회학)교수는 "가능성이 보일 때 상당한 동원력을 발휘하는 일종의 바람문화같은 것"이라며 "선진축구나 서구사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등감이 축구를 통해 극복돼 가는 과정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후 별로 좋은 일이 없었던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 월드컵 축제와 맞물려 탄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朴교수는 "이런 열기가 얼마나 계속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한양대병원 정신과 남정현(南正鉉)교수는 "넓은 의미에서 집단 히스테리 증상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사회와 개인의 정신적 다양성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안창일(安昌一·심리학)교수는 "개인과 개인의 감정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승효과를 낳는 전형적인 군중 심리의 작용"이라고도 말했다.

반면 동덕여대 정준영(사회학) 교수는 "어느 사회든 분출욕구가 존재하게 마련이며 감정을 해소할 창구가 필요한데 그동안 우리 사회는 국민을 하나로 묶을 축제가 없었다"며 "과거엔 정치가 그런 역할을 했으나 요즘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이 한국팀의 선전을 계기로 하나의 분출구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 잠재된 공동체 의식의 발현이라는 분석도 있다.

연세대 유석춘(柳錫春·사회학)교수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 넘어 길거리 응원에 모인 인파들은 민족·국가라는 틀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며 "사분오열된 우리 사회로선 분명히 긍정적인 신호"라고 말했다.

서울산업대 김광호(金光浩·매체공학)교수는 "길거리 응원은 유럽 각 지방의 거리축제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공동체 문화행사의 하나라는 점에서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고 진단했다.

문화평론가인 백지연(白智延)씨는 "거리 응원의 주체는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란 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젊은이들의 공동체 문화가 다른 형태로 되살아난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길거리 응원 열기를 월드컵 이후에도 사회발전의 에너지로 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앙대 신방과 성동규(成東圭)교수는 "붉은 악마가 PC통신 축구동호회가 모체가 된 만큼 이번 길거리 응원은 온라인 모임이 오프라인으로 활성화해 현실세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였다"며 "월드컵 폐막 이후 축구 열기가 식은 뒤 길거리 응원에서 보여준 응집력이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표출돼야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월드컵이 끝난 뒤 집단 허탈감이 엄습할 수도 있다"며 "이번 월드컵을 통해 얻은 자신감이 생산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대책을 강구할 때"라고 했다.

손민호·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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