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구원투수'오페라의 유령':뮤지컬 프로듀서 설도윤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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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 했다. 공연을 3개월 정도 끌고가면 다행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내겐 확신이 있었다. 고급예술에 목말라 하는 잠재관객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프로듀서 설도윤(43·제미로 대표)씨의 말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개막 7개월 만인 이달 30일 막을 내린다.

결과는 설씨의 예측대로 큰 성공으로 끝날 것 같다. 이미 이달 표가 다 팔렸다. 평균 객석점유율 90%대에 총 입장수입이 1백80억원(추산관객 23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총 제작비를 1백10억~1백20억원 정도로 잡으면 60억~70억원의 이익이 생긴다. 협찬금과 팸플릿 등 머천다이징 수입을 더하면 수익은 훨씬 늘어난다.

'오페라의 유령'은 이처럼 돈만 챙긴 것일까. 설씨는 "결코 아니다"고 응수한다. "관객들에겐 수준높은 예술의 향취를,뮤지컬 현장에는 선진 제작의 노하우를 전파하는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게 돈보다 훨씬 값진 성취다."

설씨에게 '오페라의 유령'은 9회말 인생의 구원투수나 다름없다. 배우에서 안무가로, 그리고 제작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이래저래 맛본 쓴맛과 상실감을 이 작품으로 말끔히 보상받으며 우뚝 다시 섰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씨는 "완전한 성공은 아니며, 이제 진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설씨가 '오페라의 유령'으로 인생의 극적인 반전을 도모한 것은 그야말로 절치부심의 결과다. 외환위기로 너나 없이 어려웠던 시기, 설씨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제작사가 부도나 쫓기다시피 하는 참담한 시절을 맞았다. 20여년 현장에서 쌓은 경력이 풍비박산날 지경이었다. 설씨는 "캐나다에 있던 친구가 수억원의 급전을 대주지 않았으면 기사회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당시의 쓰린 기억을 떠올렸다.

이런 나락에서 설씨를 구한 한줄기 빛이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1991년 뉴욕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보고 "예술성과 스펙터클에 오금이 저려오는 충격을 받았다"는 설씨는 "이 때 '한국 초연은 반드시 내가 한다'는 결심을 굳혔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는 인생의 혹한기에 당시의 그런 기억이 떠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게 98년 무렵의 일이다. 장기공연은 극장확보가 관건인데, 운이 트이려고 그랬던지 마침 LG아트센터 건립 소식이 들렸다. 책임자를 만나 당장 10개월 대관 결정을 했다. 그리고 나서 오랫동안 안면을 터온 호주 RUC('오페라의 유령'의 아시아지역 배급사)의 책임자인 팀 맥팔레인을 만나 한국 공연 의사를 타진했다. 다행히 호의적이어서 '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불굴의 의지는 있으되 돈이 없던 설씨는 '오페라의 유령'은 물론 몇가지 기획 아이디어를 싸들고 동양그룹 계열의 제미로를 찾았다. 자신의 제작사인 스타서치와 제미로의 합병형식을 택했다. 설씨는 제작 프로듀서이자 공연 분야의 대표가 돼 이 공연에 대해 거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단순한 '배짱투구'는 아니었다. 수세에 몰린 구원투수가 함부로 공을 던질 수 있겠는가. 오랜동안 현장에서 연마한 '감'과 데이터를 총동원해 회사를 설득했다. 우선 거액을 들여 시장조사부터 했고,그 결과 장기공연을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섰다."

당초 설씨는 총제작비 70억~80억원에 5개월 공연이 목표였다. 그러나 "'우리의 훌륭한 작품이 망신당하면 안되니까 4개월의 미니멈 개런티(흥행이 안되더라도 기본적으로 주어야할 돈)를 달라'는 RUC의 요구에 핏대가 나 당당히 '복수'하고 싶어 규모를 늘렸다"고 했다.

설씨는 "RUC의 계약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공연이 개막된 뒤에야 수십가지의 계약에 최종 사인할 수 있었다"며 '살벌한 전투'를 상기시켰다.

요즘 설씨가 주위사람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수익의 몇 %가 설씨의 몫일까 하는 궁금증인데, 그는 "혹시 인센티브나 있지 않을까"라며 조직원의 신분임을 강조했다.

"만약 돈을 생각했다면 아마 마(魔)가 끼어 흥행이 잘 안됐을지 모른다. 그래도 돈보다 몇배 중요한 것을 얻었다. 프로듀서로서의 명예회복과 국제적인 신뢰도다."

실제로 설씨는 이번 성공으로 세계 공연계의 거물이 됐다. 최근 콧대높기로 소문난 '오페라의 유령'의 작곡가 겸 흥행사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그에게 "내 차기 작품에 투자해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일단 '노'를 했지만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한 그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거액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설씨는 7월 기상천외한 퍼포먼스 '델라구아다'로 다시 한번 실력을 검증받을 예정이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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