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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만 있고 사또는 없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중·일 동양 삼국의 문화를 비교하여 한국은 흙, 중국은 돌 그리고 일본은 나무의 문화라고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등식으로 한·중·일 세 나라의 귀신을 비교하면 어떨까. 소복차림에 머리는 길게 풀어 헤치고…한국의 귀신은 두 팔을 내려뜨리고 있다.중국의 귀신은 팔을 앞으로 내뻗고 깡충깡충 뛴다. 한때 우리를 즐겁게 했던 홍콩판 '강시 영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일본의 귀신은 무엇을 할퀴려는 듯 두 손을 가슴 높이로 올려 마치 앞발을 들고 선 토끼 모양을 하고 원수를 찾아다닌다.

그런 으스스한 모습으로 원한을 풀기 위해 깊은 밤을 헤매는 세 나라의 귀신들. 그들의 출현에 혼비백산한 상대는 결국 물에 빠지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한국의 귀신은 다르다. 그가 찾아다니는 것은 원수가 아니다. 사또다. 한국의 귀신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성과 법치주의가 있다. 최소한 한국의 귀신은 원수를 찾아가 복수를 할 때 스스로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한국 귀신의 백미는 그가 법치주의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귀신이 사또라는 매개체를 통해 현실의 실정법에 호소한다. 장화홍련전에도 그렇다. 계모의 모함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두 자매는 소복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밤이 깊기를 기다려 고을 원님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한다. 민간설화 속의 얼마나 많은 귀신들이 이렇게 사또를 찾아가는가.

이 귀신 드라마의 절정은 사또의 기절에 있다. 담이 약하거나 사도(使道)에 투철하지 못한 사또들이 귀신의 진정을 듣기도 전에 기절해서 죽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기절해 나가기를 거듭한 끝에 강단 있고 청렴한 사또가 메시아처럼 나타나면서 드라마는 종말로 치닫는다.

마치 콜롬비아의 작가 G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속의 세계처럼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로 교직되는 한국의 귀신설화, 우리 선조들의 정서가 뒤엉켜 있는 귀신 이야기는 서글프고 아름답다. 원한을 푼 귀신과 사또는 헤어지면서 눈물의 이별을 한다. 그러나 비현실의 귀신이 현실세계의 실정법에 호소한다는 이 '귀신의 법치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살아서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사또는 파사현정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여기에 깔려 있다. 현실의 억울함은 귀신이 되어 나타나야만 하고 사또는 귀신의 출현에 기절해 넘어가는 보통의 사또가 아니라 초인간적인 메시아여야 하는 것이다. 의혹사건만 터지면 현직검사가 아니라 특별검사를 요구하는 국민감정은 바로 이 '담 큰 사또'의 기다림이 아닐까.

서울시내의 버스기사들이 교통법규를 모두 지키면서 운행할 때 이를 두고 준법투쟁이라고 불렀다.

법을 지키는 것이 투쟁이 되어야 한다니!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불법이라고 단속을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담 큰 사또'를 기다리는 귀신이 될 수밖에 없다.

며칠 전에는 고속도로를 운행하는 대형화물 트럭 운전기사들의 준법투쟁이 또 있었다. 대형 화물트럭은 고속도로에서 쉬어갈 곳이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대형트럭의 진입부터 거부하고, 그나마 도로 옆의 간이 휴게소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막아 폐쇄시켜 버렸다. 쉴 곳이 없는 운전자는 야간운행을 계속하다가 눈의 피로도가 쌓여 전방 인식에 혼란이 오고 술 취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이러니 트럭기사는 모두 귀신이 되어 '담 큰 사또'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준법이 불법인 사회, 그래서 귀신이 되어 사또를 찾아가야만 하는 사회,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구전설화의 콘텐츠 안에서 안주하겠다는 것인가.

귀신 앞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담 큰 사또'는 없는 것인가. 사또는 사도(使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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