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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와의 대화>: 문명간 교배시대 열쇠는'톨레랑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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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번 특강 주제를 '번역'으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서구 학계에선 지난 20년 간 번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어요. 다른 언어권에 속한 문화들 사이의 상호 교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죠. 번역은 이제 현대문화의 근본적인 요소로 자리잡았습니다."

-번역의 문제를 문화적 차원에서도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브리지드 바르도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바르도는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로 몰아붙이고, 심지어 월드컵 보이코트 운동을 펼치자고 하는데요.

"한마디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둔함의 극단입니다. 넓게 보면 문화간 번역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명권에서 개고기를 먹는 사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해도 '톨레랑스'(관용)를 가져야 합니다. 예컨대 이탈리아인은 고양이를 먹는 일은 쉽게 이해하거든요. 과거 전쟁 기간에 고양이를 잡아먹은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또 그 행위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어떤 동물을 잡아 먹느냐는 인류학적 문제예요. 개고기 식용 문화를 지닌 한국인에게 먹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바르도는 인종차별 주의자, 나아가 파시스트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간 타협의 미덕 가져야

-바르도는 보편주의를 내세우며 문화 상대주의로도 용인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감수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잣대는 바로 '상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식인 관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파리에 거주하도록 허락해야 할까요. 그럴 수 없지요. 프랑스에는 사람 고기를 먹는 종족을 막을 수 있는 법, 즉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요구하는 법과 개념이 존재합니다. 이에 비해 여성에게 공교육을 못받도록 하는 일부 이슬람교권 나라의 관습이 파리에서 행해질 경우엔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해요. 그들 나라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도 서구에서 보장된 여성의 신체권이라는 차원에서 문제가 되거든요. 상이한 문화 사이에 문화적 충격이 생겨날 때 일정한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이 필요한 겁니다."

-보편과 특수 사이의 이런 미묘한 관계를 염두에 두면 개별 문화 또는 문화적 스타일 간에 어떤 대화가 효과적일까요.

"때로 엄청난 문화적 차이는 상당한 물리적·심적 장애를 동반하기도 하죠.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협상과 타협의 미덕을 저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가치는 인간에게 공통된 '몸'의 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보고, 냄새 맡고, 말하고, 먹고, 배설하고, 성행위를 하며, 수직으로 서서 걷고, 쉬고 싶을 때는 수평으로 눕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위에서 열거한 인간의 기본적 행위를 방해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죠. 이같은 신체권의 차원에서, 앞서 예로 든 식인 행위는 신체의 통합성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를 위반한 것이라 볼 수 있죠. 반면 다른 나라 사람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은 저의 신체에 대해서 어떤 위반도 아니므로 저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차이는 때로 극단적인 경우 그 종말이 폭발로 끝나기도 합니다. 9·11 테러 사태는 아마도 차이의 가장 비극적인 양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는 지난해의 테러 사건에 대해 이미 글을 썼지만 그에 앞서 수 년 전부터 다양한 민족의 대대적인 이주로 인해 야기될 여러 문제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켜왔습니다. 제가 30년 안에 유럽 대륙은 여러 인종이 공존하는 다채로운 빛깔의 대륙이 될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종의 문명간 교배시대죠. 대규모 이주의 결과는 예측불허입니다. 문명사적 차원에서의 이주에 무료란 없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요. 9·11 테러 사태는 바로 상이한 문명들 사이의 상호 교류로 진일보하기 위해 치러야 할 고통이자 대가인 거죠."

-그런 고통과 대가를 줄이려면 어떤 방안이 구체적으로 필요하겠습니까.

"늦긴 했지만 초·중·고등학교등 공교육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바르도의 경우 같은 무지몽매한 일들이 반복될 것입니다. 아마도 바르도는 단 한번도 문화 인류학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주의 문제가 전세계적인 삶의 양상을 변화시킨다면 문학에서는 인터넷을 위시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변화를 촉발하고 있는 듯합니다. 문학의 쓰임새는 앞으로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제 견해는 간단해요. 문학은 늘 고유한 역할을 맡을 것입니다. 아무리 e-북이 발전해도 성서 전체를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손으로 만지고 종이 냄새도 맡으면서 읽어가는 우리의 독서 메카니즘을 바꾸어놓거나 또는 문학의 본령을 바꾸어놓을 어떤 근본적 변화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문학은 새로운 시대와 가치에 따라 늘 변해왔죠.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예요. 예컨대 온라인에 자신의 글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이 읽도록 하는 새로운 문학적 풍속이 나타나고 있어요. 그것은 문학의 자유로운 순환과 소통의 한 가지 훌륭한 방편인 만큼 아주 반길 만한 일입니다."

-디지털 문화의 또 다른 본질적 현상은 시각 이미지의 폭발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분석적 또는 이성적 사유를 약화시킬까요.

문학은 고유의 역할할 것

"현 문명이 시각 문명, 이미지 문명, 영상문명이라고요? 절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과거에도 오늘날 못지 않게 현저히 시각적인 문명들이 존재했었어요. 유럽의 경우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죠. 때문에 교회의 부조물과 회화에서 성서의 이야기나 인물들을 이해했어요.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컴퓨터가 일상 생활 속으로 보급되면서 상황은 알파벳(문자) 문명으로 돌아간 겁니다. 인터넷은 알파벳과 시각적인 것의 혼합으로 이뤄졌어요. 어쨌거나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인터넷을 온전하게 활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각 이미지를 통합하는 새로운 단계의 알파벳 문명을 향해 다시 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문화의 시각적 우세라는 생각은 1960년대에 학계에서 유포되었고 이어 서서히 언론 매체에 흡수되었는데, 이미 그 때는 사실상 시각 문화의 범람이 종료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인해 우려되는 또 다른 하나는 기억의 상실입니다. 기억은 인간과 문화 공동체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 아닙니까.

"몇 번만 클릭하면 무수한 정보가 나오니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기억하기 위한 노력과 수고는 필요없게 된 것 같죠. 그러나 인류 역사를 통해 볼 때 기억은 문화 전승의 중요한 수단이었어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이 정보의 여과 장치 기능을 한다는 점이에요. 고대 시대에 기억술은 그 핵심이 정보의 여과 방법을 일러주는 요령이었습니다. 아울러 문화적 공동체가 그같은 여과 장치를 마련했지요. 현실은 우려할 만합니다. 예컨대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에게 지난 20년 간 이탈리아 역사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지를 물으면 전혀 대답을 못해요. 기억 없이 엄청난 수의 정보를 얻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선생님의 이런 이론적 작업과 문학적 창작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첫 번째 소설을 쓸 무렵 저는 기호학자와 언어철학자로서 다뤘던 문제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소설 쓰기는 그야말로 딱딱한 이론에서 벗어나 정신적 휴식을 보내는 휴가철의 작업이었죠. 물론 양자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부정하진 않아요."

소설 쓰기는 정신적 휴식

-최근작인 『바우돌리노』 를 비롯해 선생님의 소설 세계를 간략히 설명해 주시지요.

"제 소설에는 늘 교양을 쌓아가는 주인공, 즉 인생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하나씩 새로 배워나가는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제 자신이 교수이자 교육자라는 점에서 도덕적·지적 성장 과정을 다룬 겁니다. 또 다른 특징은 소설의 기본 얼개가 일종의 이중 코드로 짜여 있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각자의 수준에서 해독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독자가 숨은 뜻을 풀어낼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자문을 던지는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정리=우상균 기자

문화적 차이에 대한 몰이해는 때로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과 수난을 준다. 지난해 9·11테러 사태는 그 극단적 표현이다. 그럴수록 톨레랑스(관용)와 보편 윤리에 대한 인류의 고민과 합의가 절실하다. 이질적 문화간의 교류와 충돌이 날로 확대되는 21세기에 첫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뜻깊다. 월드컵을 앞두고, 이 주제로 세계적 석학 움베르토 에코 교수와 대담을 마련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 특강하러 온 에코 교수를 고려대 언어학과 김성도(사진) 교수가 지난 1일 만났다. 에코와의 이번 대담은 "월드컵을 앞둔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배려해달라"는 김교수의 정중한 설득으로 가능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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