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쉰들러'에 건국훈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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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제 때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를 위해 변론을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다.

건국훈장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공로가 인정되는 인사에게 수여된다. 이 훈장을 일본인이 받기는 처음이다.

정부는 21일 일본인 고(故)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79~1953.사진) 변호사가 독립운동가 김지섭.박열 선생 등을 적극 변론하고 독립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수여식은 도쿄 주일대사관에서 열렸다. 훈장은 고인의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大石進) 일본평론사 사장에게 전달됐다.

오이시 사장은 "조선인들과 함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욕이 높았고 조선인들도 그런 뜻을 알고 고인을 소중히 여겼다"고 말했다. 유족연금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지급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중국인 31명, 영국인 6명, 미국인 3명, 아일랜드인 3명, 캐나다인 1명 등이 있다. 후세 변호사는 일본 내 조선인의 독립운동.사회주의운동 등 조선인과 관련된 법률 사건 대부분을 변론하며 조선의 독립을 지원했다. 그는 독일 나치치하에 유대인의 구명 활동을 벌인 쉰들러에 비유돼 '한국판 쉰들러'로 불린다.

후세 변호사는 1919년 재일본 유학생들이 선포한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송계백 선생 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론을 맡았다. 24년에는 의열단원으로 도쿄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참석한 일본 총리와 조선 총독을 폭살하기 위해 일본 왕궁의 이중교에 폭탄을 던진 '이중교 투탄 의거'주역인 김지섭 의사를 변론했다. 그는 또 26년 일왕과 왕족을 폭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체포된 박열 선생 등의 변론을 맡아 무죄를 주장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조선인의 항거를 적극 옹호했다.

후세 변호사는 또 천황제를 비판하다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고 이 과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두 차례 박탈당하기도 했다. 후세 변호사의 아들도 아버지와 뜻을 같이하다 투옥된 뒤 옥사했다.

일본 미야기(宮城)현에서 태어난 후세는 1902년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며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후세는 한.일합병 직후인 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조선 독립에 대해 논의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23년 한국과 일본에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몰수에 맞서 싸우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의 항일운동을 변호하기 위해 한국으로 와 현지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32년 변호사 자격정지 및 제명을 당했다. 해방 후에도 후세 변호사는 한신(阪神) 교육투쟁사건, 도쿄 조선고등학교 사건, 공안조례 폐지운동 등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재일한국인과 변함없는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도쿄의 그의 묘비에는 생전 그의 유지를 받아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과 함께"라고 쓰여 있다.

도쿄=예영준.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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