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는 만능?" 고정관념을 부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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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2000년 6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 블레어 총리는 인간 유전자 지도가 완성됐다고 발표했다. 이는 유전자 생물학이 장차 인류에게 영원 불멸의 삶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복제양 돌리가 탄생했지만 유전자의 비밀을 완전히 밝혔다고 보기 어렵다. 심장병·정신병 등 유전자와 관련이 깊다고 여겨지는 질병도 조만간 치료법을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어찌된 것인지 궁금하다. 유전자 지도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능을 이해하는 만능 열쇠가 아니었단 말인가.

미국의 과학철학가이자 페미니스트 과학자인 이블린 폭스 켈러는 신간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 에서 "생물학에 있어 인간 유전체 계획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생물학자들이 숙제를 열심히 풀고 났더니 또다른 문제의 실마리를 잡은 것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하긴 생물학자 리처드 르원틴 하버드대 교수는 켈러를 "이미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들에 생채기를 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별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한 바도 있다.

그러나 켈러가 독자에게 줄 영향은 '가벼운 생채기'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유전자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던 장미빛깔의 상식을 뿌리째 흔드는 메가톤급 충격이다. 이를테면 책에서는 생물 책에서 배우던 "DNA는 RNA를 만들고, RNA는 단백질을 만들며, 단백질은 우리 인간을 만든다"는 공식부터 결함을 갖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분자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비밀이 이런 공식보다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만도 유전자의 기능은 서열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유전적 맥락, 그것이 들어 있는 염색체 구조, 세포질과 핵의 환경에도 의존한다는 것 등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유전체 계획이 대서특필되고 오류가 있는 'DNA→RNA→단백질' 공식이 상식으로 자리잡아가는 동안 사려깊은 분자 생물학자들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생물학 전공자인 역자 이한음씨는 "켈러처럼 유전자의 개념을 역사적·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켈러의 역할은 이만큼 크다. 생물학자는 생각을 정리하고 독자는 상식을 바로잡을 기회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켈러는 영화 '쥬라기 공원'을 예로 들며 자신이 유전자의 대중적 이미지 바꾸기에 나선 이유를 설명한다. 이 작품 속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자로 그려진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고생물학 증거들로 추측해 보자면 달릴 수도 없고 코 앞의 것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문제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스토리 구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1992년까지 미국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됐던 모형 때문이었다. 꼬리를 땅에 대고 앞다리를 곧추세운 도마뱀 같은 모습이었는데 고생물학자들은 이런 표본이 되려면 목·등·꼬리가 군데군데 부러져야 가능하다고 밝혔다. 물론 스필버그는 1백년 가까이 대중이 가지고 있던 '왕 도마뱀' 렉스의 이미지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켈러는 유전자도 이대로라면 제2의 렉스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유전자가 생물의 활동과 발달뿐 아니라 번식까지 통제하는 신화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이다. 유전자가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언론과 일반인은 유전자 지도 초안으로 그토록 흥분했으며, 이제 와서는 생물학자들이 굼뜨다고 탓하고 있다. 켈러의 저작은 어려운 전문용어가 많은 편이어서 대중적으로 읽히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의미는 크다. 상식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경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홍수현 기자

저자 켈러는 또 유전체 결정론이 얼마나 남성적인 시각에서 만들어진 이론틀인지도 지적한다. 이쯤 되면 책 제목을 '유전자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로 바꾸는 것이 합리적일지 모른다. 한국판 제목은 유전자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종지부를 찍자는 의도였겠지만 'The Century of the Gene' 이란 원제는 유전자 연구로 촉발된 무궁무진한 생물학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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