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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제2부 薔薇戰爭제3장 虎相搏: "대감의 목을 주시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이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흡수하여 통일신라의 황금문화를 여는 그 첫 번째 시도로 완성한 안압지.

그 안압지에서 마침내 6월 12일. 새 임금의 즉위를 경하하는 성대한 주연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김명은 옷 속에 갑옷을 입었으며, 또 칼을 감추고 있었다. 김명의 부하인 배훤백도 옷 속에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이홍 또한 칼을 차고 있었다. 원래 임금이 있는 궐내로는 그 어떤 군신도 무장을 하고 입궐 할 수 없는 법. 지휘병을 관장하는 무장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김명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쳐 말하였다.

"네가 감히 내 앞을 가로 막느냐. 네놈이 궁궐을 보호하는 무장이라면 나는 인군을 보호하는 군장이다. 군장이 어찌 칼을 내려 놓을 수 있겠느냐."

김명은 이 안압지에서 곧바로 김예징과 김양순을 체포하여 현장에서 참형에 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 아래 비밀은 없는 법. 김명의 이러한 계획을 미리 알고 김예징과 김양순은 바로 그 전날 왕경을 도망쳐 배를 타고 청해진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사기에도 이들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월. 균정의 매서인 아찬 김예징과 아찬 김양순은 함께 도망쳐 김우징에게로 갔다."

철통같이 군사로 에워싼 후 함정을 파고 그들을 기다렸으나 마침내 김예징을 비롯한 일당들이 오히려 도망쳤음을 귀띔 받은 김명은 분기가 탱천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무능한 희강왕에 대해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 무렵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놀이가 있었는데, 이것은 주사위놀이였다.

1975년 3월부터 2년간에 걸쳐 실시된 안압지 발굴조사에서도 출토된 14면체의 주사위에는 각 면마다 네자씩의 명문이 운각되어 있는데, 이는 귀족들이 놀 때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상면(上面)의 문구대로 행동하는 놀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주사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한 잔 마시고, 크게 웃기(飮盡大笑)"

"석잔 술을 마시고 한꺼번에 가기(三盞一去)"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술 마시기(自唱自飮)"

"임의로 노래 청하기(任意請歌)".

귀족들은 술을 마시면서 주사위를 굴려 그 면에 나온 명령대로 행하면서 모처럼 취흥이 도도하였다. 이때 자리에는 김대렴(金大廉)이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입당회사(入唐廻使)로 당나라로 갔다가 차의 종자를 가져다 지리산에 심었던 원로 대신으로 김균정과 절친한 사이였다.

여러 군신들이 원로 대신 김대렴에게 주사위를 던질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자 김대렴은 웃으면서 주사위를 던졌는데, 상면에 나온 것은 다음과 같은 주문이었다.

"코끼리 모양을 하고 코 때리기(象人打鼻)"

이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주문이었다. 김대렴은 비록 노 대신이었으나 취흥을 깨지 않기 위해서 코를 잡고 마루 위를 맴돌면서 자신의 코를 때리고 있었다. 대왕을 비롯한 여러 군신들이 크게 웃으면서 즐거워하였으나 화가 난 김명은 여전히 낯을 붉힌 채 울그락 불그락하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많은 귀족들이 김명에게 주사위를 던지라고 권유하였다. 김명은 안하겠다고 거절하였으나 재삼 재사 권유가 잇따르자 일어나 주사위를 집어들고 주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문구가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이를 행하겠소이다. 이에 대해 이의가 없소이까."

"물론이나이다."

그러자 김명은 주사위를 던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김명은 주사위를 집어들고 상면에 새겨진 문구를 보았다. 그는 이홍에게 술을 따르게 한 후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켰다. 많은 귀족들은 주사위에 나온 주문이 벌주 석 잔을 거푸 들이키는 문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술 석 잔을 다 마신 김명이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김대렴 앞으로 다가갔다.

"대감."

김명은 소리쳐 말하였다.

"대감의 목을 주시오. 주사위에는 이렇게 써 있었소이다. '술 석 잔 마시고 적의 목을 베어라'라고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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