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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 6·25전쟁 ③ “미국은 피를 흘리기로 결정했다”…유엔 안보리, 참전 결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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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50년 6월 27일 안보리 474차 회의 표결 순간. 미국의 결의안을 지지하는 중국(대만)·쿠바·에콰도르·프랑스·노르웨이·영국·미국 대표 7개의 손이 6·25전쟁의 향배를 갈랐다. 반대 한 표는 유고슬라비아였다. 그때의 감격을 장면 주미대사는 이렇게 기억한다. “북한을 침범자로 규정하고 그 격퇴에 응분의 협조를 한다는 결의안을 7대 1로 채택해 트루먼 대통령의 출병(出兵) 성명과 아울러 적군이 침범한 지불과 2일 만에 응징의 철퇴는 벽력같이 내려졌다.” [장면기념사업회 제공]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한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한다.” 냉전 해체 후 세상에 나온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이 작성한 문건은 1950년 4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스탈린이 기습 남침을 지시했음을 명증한다.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쏟아지는 비를 뚫고 전차 242대를 앞세운 19만 병력의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스탈린의 예상과 달리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지도부는 민첩하게 대응했다. 전쟁이 터진 지 하루 만인 25일(현지시간)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북한의 남침을 유엔 헌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고, 전투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38도선 북쪽으로 병력을 철수할 것을 촉구”하는, 그리고 수도 서울이 함락된 27일(한국시간 28일)에는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에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한국에 제공할 것을 유엔 회원국에 권고”하는 두 개의 결의안을 이끌어 냈다. 유엔 회원국의 파병과 의료 지원 등이 가능해진 바로 그날. 미 지도부는 해·공군의 군사 개입을 결정했고, 그 즉시 전투기와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29일에 열린 긴급 국가안전보장이사회는 38선 이북으로 군사작전의 확대와 부산·진해 지역 확보를 위한 육군 투입을 결정했다. 이는 페이슨 육군 장관의 말을 빌리자면 “미국이 세계적 강대국이 된 이후 최초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피를 흘리기로 선택한 결정”이었다.

7월 7일 유엔의 기치 아래 미국이 통솔하는 통합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이 안보리를 통과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를 유엔통합사령관에 임명했다. 9월 15일 맥아더가 펼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국은 6월 27일 안보리 결의를 근거로 종래의 봉쇄 정책을 수정해 38선 돌파를 결정했다. “한국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실시한다.” 10월 7일 유엔총회가 한국의 통일을 천명하는 결의를 채택하자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다.

11월 말 중국군의 개입으로 점령 정책을 채 펴 보지도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미국은 유엔 결의에 의거해 유엔군이 북한 점령과 통치의 주체임을 주장했었다. 북한의 정세를 예측하기 어려운 오늘. 6·25전쟁 시 유엔 주도하에 세워졌던 점령 정책이 북한에 대한 통치 주체를 정하는 데 있어 역사적 선례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 온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