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변산반도에 가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9면

지난주 전국에 반가운 봄비가 내렸다. 지독한 가뭄에 잔뜩 메말랐던 땅 속으로 달콤한 빗물이 촉촉히 스며들었다. 화사한 꽃들이 너무 쉽게 져 버렸다는 섭섭함에 '봄날은 갔다'고 서운해 할 것은 없다. 발목이 쑥쑥 빠지는 갯벌, 슬금슬금 갯벌을 삼키며 차오르는 밀물, 그리고 바닷물을 그득 머금고 올라오는 싱싱한 주꾸미들…. 봄 기운은 산과 들뿐 아니라 서해 바다에도 가득하다. 발길은 어느새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를 향해 있었다.

#1.생명이 숨쉬는 갯벌

서해안 고속도로 부안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부안 방향으로 국도 30호선을 타면 변산반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게 된다. 부안읍을 지나 10여㎞를 가면 도로 우측에 검은 갯벌이 푸근한 몸통을 드러낸다. 미처 스며들지 않은 바닷물이 뻘 위로 모세혈관같은 고랑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드문드문 뻘 위에 쭈그리고 앉아 백합과 바지락을 캐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반갑다. 봄을 맞은 바다는 이렇듯 넉넉하다. 그 고마움을 되새기기도 잠시. 환경단체들이 갯벌 위에 세워 놓은 80여개의 장승과 솟대들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글프게 서 있다. 1㎞쯤 떨어진 곳에서 부안·김제·군산 앞바다의 물을 막는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갯벌은 지렁이가 꼬물대고, 망둥어가 설쳐대고, 농게가 어기적거리고, 수백만 마리 찔룩이와 저어새가 끼룩거리는 생명의 땅….' 한 환경단체가 장승 근처의 나무판에 새겨놓은 이 문장이 방조제 안의 갯벌을 주저주저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2.서해는 지금 주꾸미 철

내륙에선 꽃이 봄의 상징이라면 서해에서는 주꾸미가 그렇다. 3월 중순~4월 초순이 산란기로 이때 잡히는 주꾸미가 연중 가장 맛있다. 유명하기로야 충남 서천의 주꾸미를 치지만 변산반도 내의 격포·궁항·모항 등지에서도 주꾸미가 많이 올라온다. 여행객들이 주꾸미를 먹으러 많이 찾는 곳은 변산반도 내 서쪽의 '채석강'일대다. 채석강은 수천만년 전 바닷물에 의한 침식 작용으로 생긴 해안 절벽과 그 일대의 바다를 일컫는 말.

썰물 때 드넓게 펼쳐진 검은 갯바위 위에 앉아 역시 거무튀튀한 해안 절벽을 뒤로 하고 바다를 보며 주꾸미를 먹는 맛이 일품이다. 보통 살아있는 주꾸미를 회 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1만원어치면 둘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다.

#3.추억의 소금 창고

채석강을 벗어나 계속 30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내소사(蘇寺) 이정표가 나타난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인 633년에 세워진 절이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르는 6백여m의 푸른 전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봄 기운에 들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다시 30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곰소항 젓갈 단지, 그리고 20여채의 소금 창고들과 8만㎡에 이르는 드넓은 염전을 만나게 된다. 해방 이후 50여년 동안 천일염을 만들어온 소금 산지다.

시커먼 소금창고 한쪽에는 굵은 소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소금 창고는 보통 소나무로 만든다. 비바람이 닿는 부분은 상하지 않도록 검은 골탄(骨炭)을 바른다.

"소나무가 낫지. 짠 데서 돌은 못 버겨(견뎌). 소금이야 여가(여기가) 최고로 낫지. 하느님이 내주는 소금이랑께."

열여섯살 때부터 이곳에서 일했다는 최길순(63)씨는 이곳 소금에 대한 자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곰소 젓갈이 유명한 것은 이 소금으로 젓갈을 담그기 때문이다. 내리쬐는 햇볕에 바닷물이 채워진 염전에는 허연 거품이 둥둥 뜬다.

소금 성분이 뭉친 '소금꽃'이다. 갯벌, 주꾸미, 소금꽃….산과 들이 그러하듯 변산반도의 바닷가에도 봄이 무르익는다.

부안=글 성시윤·사진 최정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