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기자의 푸드&메드] 비만 유발 식품엔 적색신호등 표시한다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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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촉촉한 영국 빵 파운드케이크는 중량이 1파운드(453.6g)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빵의 기본 배합은 소맥분·계란·버터·설탕 등을 같은 양으로 넣는 것이다. 이 오래된 레시피대로 파운드케이크를 만들면 당·지방·포화지방 등에서 적색 경고등을 받는다. 이것이 신호등 표시제다. 어린이 비만 억제를 목표로 하는 신호등 표시제는 내년 1월부터 시행하도록 법(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특별법)에 명시돼 있다.

어린이가 즐겨 먹는 식품에 난해한 영양성분 표시(숫자) 대신 색깔을 붙여 해당 식품을 피하도록 하자는 것이 신호등 표시제의 근본 취지다. 건강 을 위해 적게 섭취해야 하는 포화지방·지방·당·나트륨 등의 함량이 높은 어린이 기호식품에는 적색등을 표시하게 돼 있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가 ‘원조’가 아니다. 영국 식품안전청(FSA)이 고안한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영국의 신호등 표시제는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신호등 표시제 도입 전후 12주간의 식품 판매량을 비교했더니 도입 전에 비해 녹색등이 많은 식품은 판매가 10% 늘고, 적색등이 많은 식품은 12% 감소한 것으로 밝혀졌다(2007년 FSA).

두 나라 신호등 표시제의 공통점은 ‘강제’가 아니라 ‘임의’로 실시한다는 것이다. 만약 식품제조업체가 적색등을 표시하기 싫으면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국내 식품업계는 이 제도의 도입을 영국 업체들보다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말이 ‘자율’일 뿐이지 실상은 구속력이 있다고 본다. 특히 시장의 힘이 제조업체에서 대형 마트 등 유통업체로 넘어간 상태에선 울며 겨자 먹기로 신호등 표시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우려한다.

신호등 표시제는 소비자 입장에선 반길 만하다. 식품을 구입하기 전에 영양정보를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신호등 표시제가 어린이를 비만·성인병으로부터 지켜줄까? 기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근거는 이렇다.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그린 푸드 존 내(학교 주변 200m 이내 식품업소) 고열량·저영양 식품 판매 금지정책은 신호등 표시제와 마찬가지로 어린이 비만 예방을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학교·학부모·교사·학생·업소 모두가 잘 모르거나 무관심하다.

어린이가 적색등이 표시돼 있지만 맛·식감·색깔이 기막힌 식품을 과연 외면할 것이냐는 것도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고열량·저영양 식품이나 적색등 식품을 왜 많이 먹어선 안 되는지”를 반복해서 알려주는 영양교육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내에서 지난해 식생활교육지원법이 발효됐으나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개점 휴업’ 상태다.

신호등 표시제의 대상 식품을 계속 축소시키는 것도 불길한 조짐이다. 제도를 시행하기도 전에 사탕·빙과류·초콜릿·아이스크림·탄산음료 등 대다수 가공식품과 햄버거 전문 프랜차이즈 제품은 제외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는 15일 한국식품협회가 주관한 신호등 표시제 관련 공청회에 다녀왔다. 신호등 표시제의 주된 대상이 되는 제빵업계 관련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빵을 만만하게 봐서’라면서 한결같이 볼멘소리였다.

신호등 표시제가 법대로 업체의 자율에 완전히 맡긴다면 굳이 예외 식품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청은 신호등 표시제의 효과를 봐가면서 단계적으로 대상 식품을 확대하겠다고 밝히지만 이도 미덥지 못하다. 어린이 비만율 감소 등 제도 시행의 효과를 밝혀줄 객관적 검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박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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