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중의 아날로그인 문화유산도 디지털을 피해갈 수 없다. 디지털을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한다. 세계 각국은 인류의 보배인 문화유산을 더 오래도록 보존하고, 더욱 가까이에서 향유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유산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일본의 현장을 둘러보고 우리나라의 현황도 짚어본다.
버튼 누르니 머리 위로 확 펼쳐지는 ‘천지창조’
일본 도쿄 토판인쇄박물관 관람객들이 디지털 자금성을 관람하고 있다. [(C) the Palace Museum/Toppan Printing]
박물관의 가상현실(VR)극장. 곡면으로 된 스크린에 ‘천지창조’가 그려진 사원의 풍경이 떠오른다. 조이스틱처럼 생긴 조절기로 전진 버튼을 누르자 저 멀리 보이던 그림이 순식간에 눈 앞으로 다가온다. 왼쪽 방향 화살표가 그려진 버튼을 누르니 왼쪽 편에 놓여있던 그림이 화면 중앙으로 이동한다. 아래쪽 방향 화살표를 누르면 화면이 뒤집히며 사원 바닥의 무늬가 눈에 들어온다.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지옥으로 가는 명단보다 천국으로 가는 명단이 더 짧지요. 천국으로 가겠다며 매달리는 사람의 모습도 보실 수 있습니다.”
해설사는 그림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내용을 설명했다. 화질은 디지털 4K(4096×2160픽셀). 풀 HD에 비해 4배 이상 선명한 화면이다. 실물 크기보다 4배 이상 확대해 봐도 화면이 깨지지 않는다. 도쿄의 작은 박물관에서 초고해상도 3D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지구 반대편의 문화유산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셈이다. 토판은 시스티나 천정화 복원을 해주는 대신 촬영·계측한 자료를 갖고 와 1998년 이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토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미 온두라스의 마야 코판 유적도 3D로 기록했다.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관(자금성)의 디지털 작업도 맡았다. 금당벽화로 유명한 호류지의 가람 등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도 디지털 4K로 재현했다. 리모컨으로 건물 위로 날아올라가듯 조절해 지붕 위의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실감났다. 건물을 지었을 당시의 모습을 추정 복원하고, 기와를 얹기 전의 뼈대만 보여주는 등의 시뮬레이션도 가능했다.
모든 것은 과학적 분석에 바탕을 뒀다. 우선 유물을 정밀 계측해 색감과 형상을 분석했다. 오늘날의 문화재 조사에 쓰이는 디지털 촬영, 3D스캔, 색감 측정 등의 기술을 동원해 유물의 입체적인 데이터를 확보했다. VR은 마치 동영상을 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1초에 30컷에 해당하는 스틸 컷을 일일이 붙여 만든 입체영상이다.
호시노 리치 부관장은 “사진이 정확하지 않으므로 미리 측정해둔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해 실물과 영상의 형태·색감이 일치하도록 3G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제작한 자료들은 디지털 기록 보관소에 저장해 두고 교육·연구용·관람용 및 인쇄용 데이터베이스로 활용한다. 도쿄 국립박물에서도 토판의 영상을 2007년부터 상영했다. 평균 좌석 점유율 78%, 관람객 만족도는 91%에 달할 정도로 호응이 좋다.
고이치 가바야마 관장은 “우리의 기술을 문화유산에도 적용해 더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누리면서도 문화재를 보존·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이치 관장은 “한국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우리의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할 정도로 앞섰던 우리나라의 인쇄기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전파됐다. 그러나 인쇄기술을 첨단산업으로 발전시키고, 그걸 다시 문화유산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일본이 독보적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점점 손상되어가는 석굴암 같은 아날로그 문화유산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일본처럼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복원해주면서 디지털 저작권을 가져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단계로까지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