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민과 苦樂 함께 한 일생 故 영국 엘리자베스여왕 모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모후(母后·본명 엘리자베스 앤절러 마거릿 보이스 리옹)의 일생은 영국 왕실의 영욕(榮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모후가 태어난 1900년 이후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왕실의 권위와 국가의 위신은 과거와 같진 않았지만 그는 국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왕실의 이미지를 몸소 실천했다.

독일 폭격기의 공습으로 런던이 불바다가 된 40년 9월 어느날. 그는 조지 6세의 왕비로서 버킹엄 궁에서 국난(國難)을 겪어내야 했다. 그때 "그래도 우린 이스트 엔드(런던 동쪽 시가지)를 눈으로 볼 수 있잖아요"라고 했던 그의 말은 전란에 위축됐던 영국인들에게 용기를 준 것으로 유명하다. 왕실 가족들이 런던을 지키고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등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영국 BBC는 여왕 모후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그녀는 수줍음 많은 가정주부였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는 국민과 함께 하는 왕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사실 이같은 그의 삶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왕가에서 아홉째 자녀로 태어난 여왕 모후는 요크의 백작이자 조지 5세 국왕의 둘째 아들인 알버트와 23년에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왕위와는 관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됐었다.

하지만 조지 5세 국왕의 뒤를 이어야 할 에드워드 8세가 왕관을 버리고 미국인 이혼녀인 월리스 심슨을 택하는 '세기의 로맨스'로 모후의 남편이었던 앨버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

남편 조지 6세의 뒷바라지는 물론 52년 남편의 서거 뒤 딸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계속했다. 모두 40여회의 해외 여행을 통해 왕실의 이미지를 전세계에 심었으며, 3백50여개 자선단체의 후원자로 나섰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라를 비울 때는 손자·손녀들을 직접 돌보는 등 할머니로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다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등 각국 정상은 지난달 30일 여왕 모후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 "여왕 모후의 친절한 미소는 '우리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얼굴 중 하나'였다"며 "프랑스 국민은 양국이 나란히 자유를 위해 싸우던 어려운 시절에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고 썼다.

강홍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