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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의 봄 : 달콤한 봄바람 맞는 사람들 얼굴은 연한 봄빛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혹시 우리는 봄을 느끼는 데도 속도전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꽃이 만개하기도 전에, 봄기운만 살짝 맛보다 정작 봄의 절정에선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앞으로만 내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매번 오는 봄이지만 한 번도 같은 봄인 적은 없다. 느긋하게 봄을 맞아보자. 시인들이 도시의 봄, 일터의 봄, 전원의 봄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나는 봄만 되면 좀 유치해진다. 봄 햇살에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잘 부풀고, 바람에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콩콩 높아진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렇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봄꽃들도 유치하기는 마찬가지다. 개나리의 노랑이며 진달래의 분홍이며 산수유의 희멀건 노랑들도 결코 고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유치해진다는 것은 삶의 원형을 체험해 보는 일이기도 하지 않는가.

내게 봄이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주는 전령사는 바람이다. 막무가내로 달콤한 이 바람 때문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그 유명한 시구는 내게 와서 "바람이 분다. 밖으로 나가야겠다"로 바뀐다. 나는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동면을 끝낸 곰처럼 자꾸만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거두절미하고 바람이 가자는 땅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나는 휴대용 CD플레이어에 CD를 하나 넣는다. 손에 잡힌 CD가 크라잉넛이든 심수봉이든 퀸이든 기타로든 상관없다. 봄에는 내게 모든 음악이 군가처럼 들린다. 그리고 조금 더 전투적으로 살고 싶어진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헐렁한 청바지와 점퍼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내가 바람의 몸이 되는 시간은 늘 한낮이다. 오늘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사는 신도시에서 서울의 도심까지는 한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를 타고 창가 쪽의 자리에 앉는다. 유리 속에서 보아도 봄바람은 경쾌하고 가볍다. 나는 늘 그렇듯이 대형 서점이 있는 버스의 회차 지점에서 내린다. 여전히 두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조금 더 높인다. 그러나 봄바람이 부는 오늘같은 날에는 대형 서점으로 가는 지하도로 잘 들어가지 않는다. 건너편 도로의 모퉁이에 매달린 카페의 유리문도 잘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

벽 속의 땅도, 유리 속의 땅도 아닌 그냥 봄바람이 가자는 길로 간다. 최초의 발자국을 찍기 시작한 병아리처럼 한낮의 보도블록 위를 걷는다. 그럴 때 나는 약간 뒤뚱거린다. 바람이 부풀어서인지, 내 심장이 부풀어서인지, 둘 중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 대로변에 놓인 벤치에 앉는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서 바람 속으로 머리를, 다리를, 영혼을 넣었다 뺐다 한다. 햇빛 알갱이를 몸 안에 가득 넣은 공기들이 내 얼굴을 톡톡 두드린다. 이 순간 누가 나를 자세히 본다면 조금은 우스꽝스러우리라. 두 다리를 간당간당 흔들며 몽상에 빠진 내가 어찌 그렇게 보이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돌아갈 때는 가끔 가는 갤러리 앞뜰에 가보리라. 열흘 전 보았던 모란의 빨간 새순이 오늘은 엄지손가락만큼 더 올라와 있을 것이다. 나는 봄꽃보다 뾰족뾰족 올라오는 새순이 더 좋다.

몇 무리의 사람들이 연이어 내 그림자 위로 지나간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깔깔거리며 가기도 한다. 가로수들도 아직 연두빛 심장 박동기를 매달지 않았고, 꽃들의 절정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의 얼굴은 이미 연하고 환한 구석이 보기 좋다.

보도블록 위로는 사람들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봄바람도 함께 다니고 있다. 차고 낯선 곳에서 발아하기를 좋아하는 이 바람은 해마다 신품종임에 틀림없다. 늘 새롭고 달콤하니까 말이다. 나는 이 신품종 바람이 좋다. 나는 혼자 도시의 허공을 보고 중얼거린다. 그래, 오규원의 시처럼, 꽃이여, 나무여, 그대여, "봄은 자유다. 자, 마음대로 뛰어라."

이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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