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안나카레니나의 법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진화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이름붙인 '안나카레니나의 법칙'이란 게 있다.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이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란 구절로 시작하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한 마디로 잘나가는 집안은 화목하고 넉넉하고 걱정없는 등 모두 비슷하지만 잘 안되는 집구석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천차만별이란 현상을 담은 법칙이다.

IMF사태 때보다 더 하다는 우리 경제의 불황에 관한 원인분석이 정책 실패, 내수와 투자 부진에 유가.환율 등 여럿인 것도 결국은 이 법칙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며칠 전 만난 한 인문학 전문출판사 대표는 출판 불황, 나아가 인문학 위기를 흔히 경기 침체 탓이라 하지만 경기가 안 좋아서 책을 안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안 읽어서 경제가 나빠졌다고 색다른 풀이를 했다.

논거는 이랬다. 자료를 뒤져보니 6.25전쟁 당시 피란지 부산에서 세계문학전집이며 세계사상전집 같은 대형 기획물이 출간되었고 월간 '사상계'가 1960년대 전후 한창때 10만부가 나갔더란다. 당시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을 리 없다. 그런 와중에 고급 교양잡지를 즐겨 읽고 문사철(文史哲)의 향기에 젖었던 세대가 '한강의 기적'의 주역이었다는 설명이었다. 이해가 갔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경제발전을 이뤘는가. 풍부한 자원이나 자금, 첨단 기술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노동력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던 것 아닌가. 그리고 문학.철학 등 인문학이 이들을 키웠다면 억지인가.

이 출판인은 그러나 우리 사회가 70, 80년대에 경제지상론에 빠져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자식들을 키워냈고 이렇게 자란 세대가 지금 책을 멀리하게 된 것이라 진단하며 책 만들기보다 독서운동에 매달리고 싶다 했다.

"지금 모두 경제를 살리자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지 않는 풍토로는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60년대 인문학이 융성하던 시절의 열매 따먹기에 급급한 겁니다. 독서는, 특히 인문학 사랑은 우리 사회의 보약이고 투자입니다. 따먹기만 하고 투자를 하지 않으니 우리 자손들이 어떻게 뭘 의지해 살아갈까요?"

글쎄, 이런 분석이 얼마나 타당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안나카레니나의 법칙'으로 돌아가면 출판 불황의 원인도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출판사가 많아지고 출간 종수가 늘면서 책 한종당 몫이 줄어들었을 수도 있고 공공도서관의 역할이 미미해서일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은 활자문화의 쇠락이라는 풀이도 가능하고 입시 위주 교육 풍토를 탓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 안 읽는 세태를 얄팍한 주머니사정 탓으로만 돌릴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먹고 살기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로또 복권 1등 상금 총액이 100억원을 훌쩍 넘기는 나라다. 그런데도 내년도 문화관광부 예산에선, 올해 있던 공공 도서관의 신간 구입비 130억원이 사라졌단다. 인문학 출판사들로선 그나마 힘이 되어주던 도서관 납품길이 좁아지는 셈이다. 말인즉 각 지자체에서 도서관 자료를 마련할 거라지만 도로 포장, 다리 놓기 등에 비해 생색도 나지 않을 도서관 책 마련에 신경쓸 지자체장들이 얼마나 될까. 도서관 예산에 관해 강제규정도 없는 마당에.

출판, 특히 인문학 도서의 침체는 출판계만의 문제가 아니고 시장원리에 맡겨 팽개쳐둘 일은 더더욱 아니다. 정부 당국, 교육계 등 우리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한다. 경제 체질을 튼튼하게 만들어 후손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라도.

김성희 문화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