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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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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쌀을 먹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어릴 적 보릿고개를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만하다.

필자의 학창 시절이었던 1970년대엔 쌀이 부족해 보리나 콩을 섞은 혼식이나 밀가루 음식을 장려했다. 그런데 요즘은 쌀을 너무 안먹어 많이 먹자고 부탁하는 지경에 와있다.

과연 쌀은 우리에게 단지 먹는 식량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쌀의 상징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 쌀은 식량 이상으로 귀한 존재였다.

전통적으로 풍년을 상징하는 것은 쌀의 생산량이다. 볏가릿대 세우기나 줄다리기 등의 기풍의례(祈豊儀禮)가 정월에 집중됐던 이유도 쌀의 생산량을 늘려 보려는 간절한 기원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이 땅에서 벼농사가 뿌리내릴 당시부터 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쌀은 하층민들이 먹기에는 힘든 고급 곡물이었다. 제사 때나 되어야 고기와 함께 겨우 맛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제사에 올리는 제물 중에서 곡물로는 쌀로 한 메가 유일하다. 일반적으로 제사를 지낼 때는 밥을 올리지만, 굿이나 고사 등 신(神)을 위한 제사에서는 생쌀을 그대로 올린다. 즉 조상들은 메를 먹지만, 신들은 생쌀을 먹는다. 조상은 사람의 식성과 같지만 신은 다르다는 관념이 반영된 결과다.

이처럼 신을 위한 제사에 쌀이 오르는 것은 보리나 콩같은 곡물과 달리 신성함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상도에서는 성주단지나 삼신, 그리고 용단지 등에 쌀을 담아둔다. 이들 단지는 집안에서 모시는 각 신들의 신체(神體)를 상징한다.

같은 맥락에서 무당들이 점을 칠 때 쌀을 이용하는 것도 '신의 뜻을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아가 어촌에서는 귀신들을 쫓아낼 때도 쌀을 사용한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거나, 도깨비불 등이 나타나 괴롭히면 쌀을 배에 뿌려 정화시킨다.

쌀의 신성한 능력은 벼의 짚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금줄이 좋은 예다. 일반적으로 새끼줄을 꼬는 것은 오른쪽 방향이다. 반대로 왼편으로 꼰 새끼줄은 금기(禁忌)의 관념이 담겨진 금줄이다.

당제(堂祭)를 지낼 때나 아기를 낳았을 때 당(堂)이나 대문에 금줄을 친다. 이같은 행위는 금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왜 금줄을 짚으로 꼬는가. 역시 쌀이 지닌 상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성함과 잡귀를 쫓을 수 있는 주술적 능력을 지닌 쌀의 신통력에 의존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이제는 쌀이 과거와 같은 의미나 상징성을 지니지 못한다. 쌀을 먹어 달라고 부탁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결식아동이 남아 있다. 이들에게 조금씩이나 쌀을 모아 전해준다면 농부들에게도 크나큰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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