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팔 젊은이 신문했던 학교엔 집기가 나뒹굴고 교실 바닥 곳곳 핏자국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16일 오전 예루살렘과 남쪽 베들레헴을 잇는 60번 국도.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줄어들던 자동차들이 베들레헴 입구에 이르자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묘한 적막감마저 느껴진다. 자동차에 테이프로 'TV'라고 큼직하게 써붙였지만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올 것 같다.

M-16 소총을 든 이스라엘 병사가 신분을 확인하고는 "교전 중"이라며 기다리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르륵 드르륵"하는 기관총 소리에 이어 "탕탕탕"하는 총성이 귓전을 때렸다.

30여분이 지나자 병사 한명이 들어가도 좋다는 수신호를 해왔다. 차량 돌진을 막기 위해 삼중으로 설치된 바리케이드들을 지그재그로 통과했다.

'성탄(聖誕)의 도시' 베들레헴.증오와 절망의 먹구름이 도시를 무겁게 짓누를 뿐 그곳엔 구원의 태양은 비치지 않았다. 귀를 째는 아카보 소총의 연발음만이 암울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환각제였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탄생교회 앞 광장. 팔레스타인 주민 수십명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대고 있다. 이틀 전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단체) 대원들이 이스라엘측 '프락치' 2명을 즉결처형해 시신을 끌고 다닌 현장이다.

교회 앞 광장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일종의 피신처였다. 맞은편 힌디자 언덕에 주둔한 이스라엘군의 사격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자고 있는데 총탄이 유리창문을 뚫고 들어와 벽에 박혔다." 하지즈라는 이름의 30대 청년은 가족들을 친지집에 피신시키고 자신은 친구들과 나흘째 여기서 노숙 중이라고 말했다. 동네 주민 대부분이 하지즈처럼 집을 버리고 대피했다.

미국의 앤서니 지니 특사가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하던 15일 밤에도 이곳에선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경찰서와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의 경호부대인 포스17 부대 막사 건물은 F-16의 미사일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베들레헴대학 건물에는 토 미사일 네발이 덮쳤다.

하지즈 옆에 있던 청년은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이후 하루도 일을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는 포탄에 맞아 죽는 것보다 굶어죽는 걱정을 해야 할 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5일 오전 팔레스타인 최대의 자치도시 라말라로 들어가는 검문소 앞. 1백여대의 자동차가 길게 줄지어 있다. 전날 밤 이스라엘군이 라말라에서 철수하면서 봉쇄가 풀렸기 때문이다. 탑승자들은 검문소 50m 앞에 차를 세운 뒤 소총을 겨눈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윗옷을 치켜올려 폭탄을 허리에 두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얼마 전 검문소 앞에서 자폭테러가 발생했다.

주민들이 모여 간밤의 안부를 묻곤 하던 라말라 중심가의 사자 광장. 여기서 만난 팔레스타인계 일간지 알 아얌의 피라스 타느네(24)기자는 "고층건물에 매복한 이스라엘 저격수들이 움직이는 모든 물체에 총격을 가했다"고 말한다. 한 40대 남자는 "이스라엘군은 TV 안테나를 바로잡으려고 옥상에 올라온 주민을 사살한 뒤 시신을 수습하려던 아들마저 쏴죽였다"며 울부짖는다.

이스라엘군의 주요 공격목표였던 아말리 난민촌. 성한 담벼락이 드물고, 탱크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자동차 잔해들이 발에 채인다. 무장 테러리스트를 색출하겠다며 이스라엘군이 난민촌의 젊은이들을 체포해 신문했던 초등학교 교실 바닥에는 여러 군데에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군이 하룻밤 새 세번이나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했다"고 한 노인은 흥분했다.

정오가 지나자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시민들이 팔레스타인 국기와 이슬람 지하드(성전)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들고 광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군에 사살된 팔레스타인인 시신을 멘 행렬이 뒤를 이었다. 팔레스타인 민병대원들은 "유대인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주자"고 외치며 하늘을 향해 아카보 소총을 쏘아댔다. 아라파트 수반의 집무실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관계자는 "재작년 2차 인티파다 개시 전 14%였던 라말라의 실업률이 지금은 70%에 달한다"며 "우리 젊은이들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인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누군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배에 두른 폭약을 느닷없이 터뜨린다고 상상해 보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공포를 모른다." 검문소에서 만난 한 이스라엘 병사는 절규하듯 말했다.

어느 쪽 편도 들기 힘든 '증오의 무한 평행선'….감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황금사원이 석양을 받아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